1930년대 오클라호마(Oklahoma)에서 땅을 일구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조드(Joad) 일가는 연이은 흉년과 한파로 인해 은행에 빚을 지게 된다. 조드 일가뿐 아니라 주변의 소농들은 늘어만 가는 은행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엔 땅을 차압당하고 거리로 내쫓긴다.
이들은 캘리포니아는 일자리가 넘쳐나는 낙원이라는 전단지를 읽고, 많지도 않은 재산을 처분하여 중고차와 여행 경비를 마련하는 가족들. 각종 생활가재도구뿐만 아니라 어린아이, 임산부, 노인, 그리고 우연히 만난 목사 케이시(Casy)를 포함해 13명을 꾸역꾸역 태운 6인승 중고차는 무작정 도로로 나선다.
이들의 여행은 순탄치 않아, 출발하자마자 차마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날 수 없었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생존이 걸린 여행 도중 슬픔마저 만끽할 겨를이 없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때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캘리포니아를 향해 차를 몬다.
강을 넘고, 산을 넘고, 사막을 가로지른 여행은 혹독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캘리포니아로 다가갈수록 자신들이 품었던 낙원과는 점점 동떨어진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이미 사람들은 넘쳐나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을 뿐더러, 설령 찾는다고 해도 굶주림조차 면하기 어렵다는 게 마음을 무겁게 한다. 조드네 가족은 점점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이미 이들은 발걸음은 돌이킬 수가 없다. “그 건 사실이 아니겠지.” 이들은 애써 부정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서쪽을 향해 여로(旅路)를 재촉한다.
희망조차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 한 가족의 모습은 대공황기의 소시민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캘리포니아로 상징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 속에서, 가족의 유대는 깨어지고 연약한 자들은 생계를 이어가지 못해 죽어간다. 여기에는 슬픔조차 없는 이성의 마비가 있다.
은행과 자본가들의 악독한 탐욕, 일자리를 찾는 방랑자의 삶과는 무관한, 보호벽 안의 안전한 삶 속에서 외부를 향한 ‘기독교적’인 동정은 혐오로 변해간다. 차츰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이방인들을 공포어린 시선으로 증오하는 이들.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소유에 근거한 교묘한 방어기제. 방랑자들은 산업자본으로 인해 생활터전을 잃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로 인해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추악한 범죄자로 낙인찍힌다.
‘분노의 포도’는 미국의 1930년대 대공황을 배경으로 하며, 가난한 소작인 조드 일가의 삶의 모습을 통해 미국의 사회적 모순과 불의를 다룬 존 스타인벡의 대작 소설이다.
마치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소외계층의 젊은이들이 2011년 9월 17일, 텐트와 침낭 등 간단한 캠핑도구를 챙겨 월가(街)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제 ‘리버티 플라자’로 불리는 주코티 공원에 텐트를 치고 구호와 호소를 담은 피켓을 세웠다. 이 소식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많은 청년들이 월가로 몰려들었고, 시카고와 보스턴 등 미국 내에서 비슷한 시위가 이어졌다.
성난 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 교사, 학생, 간호사 심지어 60년대 반전 운동을 주도했던 노년층까지 시위대로 집결하고 있다. 규모뿐만 아니라 시위의 활동 범위 또한 넓어지면서, 전 세계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시위가 타락한 금융자본에 대한 항의로 시작됐다는 점은 그 의미가 작지 않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금융자본은 잠시 위축되는 듯했지만 정부의 대규모 지원으로 대부분 되살아났다. 위기를 불러온 금융자본을 규제할 것으로 기대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노력도 큰 진전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는 너무나 당연하다. 월가 시위가 갖는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고 금융자본에 대한 국제적 통제장치 마련을 더 늦춰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99%다”라고 외치는 시위대의 목소리는 더욱 절실하다. 미국민의 1%가 99%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깨진 거울”이다.
가장 진전된 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다는 미국에서 민주주의적 각종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소수의 독과점 지배층에 의해 인질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1930년대에 활개 치던 미국 자본주의의 칼날, 아니 산업혁명의 저 우렁찬 구호가 인류를 처참한 대공황으로 몰고 간 자본의 착취적 타성을 ‘악마의 맷돌’로 비유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고발이 민주주의의 종주국을 구가(謳歌)하는 미국의 오늘을 질타하는 경구(警句)로 반향(反響)하고 있는 것은 설명이 불가능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0년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운동했을 당시 시작은 미약했으나 승리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그리고 그 승리는 미국 역사를 바꿨다.
이번 월가 점령 시위대가 몰고 온 파도 역시 그런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미국은 정치와 사회 전반에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조짐이 보인다.
시위대가 원하는 건 깨진 아메리칸 드림의 부활이다.
월가 시위는 반(反)민주주의적 독과점으로 특징되는 자본주의의 ‘썩은 문짝’을 차고 “99%의 인민을 위한” 새로운 제도가 나와야 할 당위를 인류의 가슴에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고 싶다.
이선명
US News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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