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런던 코벤트가든의 로열오페라가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 주연할 예정이던 미국인 소프라노 데보라 보이트(당시 43세)를 뚱뚱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아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로열오페라 측은 현대적으로 해석한 오페라에서 보이트가 날씬한 검은 칵테일 드레스를 입어야하는 아리아드네로 나오기엔 너무 뚱뚱하다고 보이트 출연 취소 이유를 밝혔었다. 당시 보이트의 체중은 220파운드로 알려졌었다.
이 사건을 놓고 당시 오페라계는 스타일이 먼저냐 아니면 내용이 먼저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토론이 요란했었다. 가수가 진짜 스타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폐병을 앓다 죽는 비올레타나 미미를 뚱보가 노래하는 것은 꼴불견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내가 지난 6일 LA 오페라가 공연한 구노의 아름답고 비극적인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을 보면서 자꾸 생각난 것이 오페라의 시각 드라마로서의 스타일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더욱 애처롭고 간절하며 또 정열적이요 로맨틱한 것은 그것이 철없는 10대 아이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런 선입견 때문인지 이 날 무대에 선 로미오 역의 비토리오 그리골로와 줄리엣 역의 니노 마체에사를 보면서 난 자꾸 어린 로미오와 줄리엣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특히 마체에사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반면 그리골로는 어려 보여 연상의 여인과 연하의 청년과의 사랑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둘의 콤비가 절묘하고 화끈했더라면 이런 뚱딴지같은 생각이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 둘에 비하면 수년 전에 역시 이곳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노래한 롤란도 비야손과 아나 네트레브코의 노래와 콤비는 완벽해 나로 하여금 그들의 나이를 잊게 했었다.
지난 1936년에 나온 조지 큐커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에 출연한 레즐리 하워드와 노마 쉬어러는 어린 두 연인으로 나오기엔 나이가 너무 들었었는데도 그것을 잊게 한 것은 둘 간의 호흡이 일치하는 콤비 때문이다.
마차에사는 성량은 풍부했지만 자연스럽지가 못 했는데 고음에 이를 때면 음성이 갈라지면서 거의 비명처럼 들려 줄리엣의 애련하고 타는 가슴이 제대로 전달돼 오질 않았다. 그러나 벨칸토 창법의 그리골로의 노래는 달콤하면서도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느낌에도 불구하고 구노의 오페라는 로맨틱하고 비극적으로 뜨겁고 또 멜로디가 화사하다. 오페라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듀엣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가슴을 쥐어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발코니 신’과 ‘이별의 신’ 그리고 ‘무덤 속 신’(사진)이다. 자기 집 발코니에서 “오 로미오 왜 당신은 로미오인가요”라며 원수를 사랑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는 줄리엣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로미오의 듀엣은 참으로 곱다. 사랑의 희열과 이별의 아픔을 나이팅게일과 종달새의 이름을 대어가며 부르는 이별의 듀엣과 독약과 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며 나누는 마지막 노래는 무딘 가슴마저 움직일 만큼 감미롭고 아프다.
로미오의 친구 머큐시오로 나온 한국계 바리톤 김무섭의 노래를 포함해 오케스트라의 연주(플라시도 도밍고 지휘) 등 전반적으로 무난한 공연으로 간단한 세트와 의상이 좋다. 오페라는 오는 26일 LA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한 차례 더 공연된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중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것은 프랑코 제피렐리의 1968년작. 제피렐리는 당시 각기 17세와 15세였던 레너드 파이팅과 올리비아 허시를 주인공으로 발탁했는데 둘이 진짜 어린 아이들처럼 사랑에 웃고 울고 하는 모습이 애처롭고 귀엽다. 촬영과 의상이 화려한 영화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니노 로타의 탄식과도 같은 음악이다. 이와 함께 젊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스가 주연한 MTV 스타일의 갱영화 ‘로미오+줄리엣’도 화끈하게 멋있다. 칼 대신 총으로 대결하는 두 원수 가문의 얘기를 연극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해 그린 현대판이다.
그리고 나탈리 우드와 리처드 베이머가 나온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도 시간과 장소를 각기 현대의 뉴욕으로 옮긴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한 이 영화는 최근 개봉 50주년을 맞아 블루레이로 나왔다.
한편 현재 상영 중인 ‘익명’(Anonymous)은 진짜 셰익스피어가 누구인가를 묻는 미스터리 스릴러 식의 궁중 의상극이다. 이런 의문은 근 1세기 전부터 제기돼 왔는데 영화는 진짜 셰익스피어는 에드워드 드 비어 백작으로 그는 자기 신분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희곡을 술꾼 3류 배우였던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것처럼 꾸몄다고 결론짓고 있다.
박흥진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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