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현해탄 건너 어느 산간벽지에서는 탕(湯)속에 쌀겨 주머니를 넣고 목욕을 끝낸 여인네들이 어미의 젖내 같은 햅쌀의 향기를 온몸 가득히 적시며 한겨울 눈 속에 갇혀 죽(竹)채반, 스시발, 부챗살 등을 만드는 사내들을 위해 정성껏 술을 빚고 있겠고, 어느 외떨어진 작은 어촌에서는 뱃길질을 평생 업으로 삼고 사는 사내들이 겨울이면 북풍이 강하게 몰아치는 양지 바른 계곡에다 덕장을 열면서 부르는 구성진 가락이 골짜기 가득히 메아리 칠 것이다.
곧 닥칠 연말! 오래 잊혀 지냈던 단골이 반갑게 들를 테고, 송년의 아쉬움을 달래며 서로의 마음의 벽을 허물고 내일을 기약하는 외식의 자리가 늘면서 우리 스시바는 연중 가장 바쁜 때를 맞게 될 것이다. 쿠릴열도(러일 영토분쟁 중)부터 남단의 오키나와까지 아름다운 활 모양을 했다는 일본 열도는 3,000미터가 넘는 산도 수두룩한 산악 국가인데 이런 산간지방에서 생선을 쌀에 보관시키면서 시작된 400년 역사의 스시에서, 현재 우리가 즐기는 에도(지금의 도쿄) 스시는 부드럽고 순한 맛의 관서지방( 교토, 오사카 중심)의 공가(公家)나 상가(商家) 요리에 비해, 깊은 바다에서 나는 단단하고 살 많은 양질의 생선을 많이 썼던 무가(武家)의 요리로써 관동지방에서 유행했었다.
1928년 관동 대지진 때 폐허가 된 동경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전국으로 흩어졌던 사내들에 의해 빠르게 일본 전역에 유행이 됐었고, 1964년 동경 올림픽 때 비로소 스시는 음식문화가 다른 이들에게 폭 넓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 남아도는 수산물 수출이 시작되고 일본 수산청의 꾸준한 스시 보급정책과 쉐프들의 칼날 같은 장인정신 덕분에 지금은 이 시대 최고의 외식문화로 이 땅에도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날이 차지면서 생선은 껍질 안쪽 기름진 살이 맛있을 때인데, 지방 조직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한 칼에 엷게 베어내는 노련한 쉐프의 칼솜씨가 돋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심해(深海)가 빚어준 결 고운 빛깔의 생선과 타는 듯한 태양이 만들어준, 부처의 사리(舍利)만큼이나 영롱한 뽀얀 햅쌀밥으로 빚은 스시가, 천년의 향을 머금은 스기(杉나무)도마 위에 붉게 물든 단풍잎새 하나와 함께 오르면 이는 어느덧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바에 앉은 손님은 먹기도 전에 벌써 식도락의 즐거움은 만끽하는 것이다.
스시바의 벽면을 장식한 다양한 문양(文樣)의 커다란 접시들! 그 옛날 스시를 거리포장마차에서 팔던 시절, 스시를 빚는 사내들은 심부름 온 하인들이 스시를 담아가기 위해 길게 늘어놓은 접시들 중에서 접시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뉘 댁에서 주문한 건지를 알았으며, 덕분에 체면 때문에 거리에 나서지 못하는 지체 높으신 분들은 집에 앉아서 외식을 즐겼단다.
또한 쌀이 귀한 시절에는 쌀을 주고 스시를 받아 갔다고 한다. 쌀 한 홉이면 대략 스시 10쪽을 빚고 이는 보통의 한 끼 양이다. 밥 한 톨 안 남기고 깨끗하게 먹어치운 뒷자리, 화려하지만 소박하고 알뜰한 스시문화의 자랑일 것이다. 현대의 요식업이 대자본을 등에 업고 젊은 후드(Food) 코디네이터의 시대 감각을 앞세워 운영된다면, 우리 작은 스시바는 우직스러운 사내가 눈 앞에서 빚어내는 살아있는 예술에 반하고 와사비의 톡 쏘는 향에 반하고 일본 술에 반하고, 식기, 젓가락, 이런 소품을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 오늘도 이 땅 어딘가에서 또 하나 문을 열 것이다.
가을을 찾아 나선 여행객들이 머무는 곳은 식도락이 있는 곳, 한국도 화홍 방파제에서 전어를 즐기고, 진도대교 아래, 이순신 장군의 명랑대첩지인 울돌목에서는 가을 숭어회를 즐기며 향수에 젖어 보기도 할 거다. 버지니아 콴티코 해병기지 안에 있는 작은 스시바는 해병들이 계급장을 떼어놓고 격 없이 앉아 스시를 즐기고 오키나와 산 ‘타이거’ 맥주로 조용히 브라보를 외친다.
이제 우리의 평창 올림픽, 한식을 전도할 또 한 번의 기회다. 평창은 오대산 상원사 계곡물이 차면서 용천수가 많아 일찍이 송어 양식이 활발해 그 옛날 까다롭기로 이름난 미 8군에 벌써 무지개 송어를 군납한 저력도 있다. 이 지방 산채비빔밥은 또한 얼마나 맛있는가! 대구 세계육상대회처럼 한식의 오명을 남기는 불행한 사태가 안 일어나기를 빈다. 이 가을은 말만 살찌우지 말고 우리도 살찌우자!
이규억 / 알렉산드리아,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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