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셔츠 위에 회색 상의를 입은 작달막한 키의 로만 폴란스키(78)는 나이답지 않게 젊고 에너지가 가득했다. 잿빛 머리와 장난기 심한 아이 같은 얼굴에 총명한 재주꾼의 눈을 한 폴란스키는 쾌활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었는데 그것이 가끔 매우 냉소적이어서 웃다가도 찌르는 듯한 감촉을 느끼게 된다.
지난달 파리에서 만난 폴란스키와의 인터뷰는 매우 뜻 있고 풍성한 수확이었다. 이번에 만사를 제쳐놓고 파리에 간 까닭도 도망자로서 미국에 올 수 없는 그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오는 연말에 개봉될 연극이 원전인 4인극 ‘카니지’(Carnage)를 감독한 폴란스키와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와의 인터뷰가 지난달 23일 우리들의 숙소인 호텔 플라자 아테네에서 있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아잡고 인터뷰장으로 들어온 폴란스키는 박수로 환영하는 우리들과의 인터뷰가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이었다. 대답도 솔직했는데 세월을 달관한 듯이 있는 것을 다 털어놓으며 인터뷰를 즐겼다.
지난 1978년 할리웃에서의 전성기에 섹스범죄를 저지르고 파리로 달아난 폴란스키는 “요즘은 옛날과 달리 반드시 할리웃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서 “그러나 할리웃의 친구들과 단골 델리집이 그립다”고 고백했다.
폴란스키는 자기는 일이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결코 그것이 달리 되기를 원치는 않는다며 자신이 일종의 운명론자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내가 할리웃에 있었다면 내 생애가 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고 부언했다.
폴란스키가 도망자가 된 이유는 그가 지난 1977년 할리웃의 잭 니콜슨의 집에서 모델 지망생인 13세난 소녀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이듬해 선고공판 직전에 파리로 도망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그는 지금까지 미 사법당국의 지명수배자로 남아 있다. 그는 지난 2009년 스위스로 생애업적상을 받으러 갔다가 미 사법당국의 체포 협조에 응한 스위스 경찰에 의해 체포된 뒤 재판을 받고 풀려났는데 상은 뒤 늦게 올해 받았다.
유대인인 폴란스키는 어렸을 때부터 도망자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폴란드로 이주했다. 이어 2차 대전이 나면서 그의 부모는 유대인 수용소에 감금돼 어머니는 개스 처형됐다.
그 후 어린 폴란스키는 크라코우의 게토를 탈출, 도망자로서 나치를 피해 시골을 전전하며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가톨릭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생존했다. 폴란스키가 지난 2003년 오스카 감독상을 받은 ‘피아니스트’도 자신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그는 “그 영화는 내 왼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경험 탓인지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영화도 제임스 메이슨이 에레해방군(IRA) 도망자로 나오는 캐롤 리드 감독의 영국 영화 ‘오드 맨 아웃’이라고. 또 다른 영화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나온 ‘햄릿’. 폴란스키는 인터뷰에서 도망자로서의 자기 신세를 스스로 조롱하면서 농담을 했는데 “여러분들이 ‘카니지’로 내게 상을 줘도 난 할리웃엘 가지 못하니 일찌감치 다른 사람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능청을 떨었다. 그러나 그 말의 여운 속에는 할리웃에 대한 그리움이 어른거렸다.
폴란스키는 영화인생 50여년을 보내면서 그 동안 많은 기술의 발전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컴퓨터 기술은 과거 못하던 것을 가능케 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면서 “나도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젊음을 일단 유전자 탓으로 돌린 뒤 “스포츠 하고 좋은 음식 먹고 시가를 빼고 금연하기 때문”이라고 그 비결을 알려줬다.
폴란스키는 이어 젊음에 집착하는 한 여자의 얘기를 시대극으로 만들 생각이라면서 “요즘 사람들이 성형수술과 크림과 약으로 광적으로 젊어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반세기가 넘도록 영화를 만드는 동기를 주는 원동력은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도전정신”이라면서 “그러나 주제가 날 움직여야 된다”고 덧붙였다.
폴란스키는 파리를 찾는 자기 영화에 나온 할리웃 배우들을 가끔 만난다면서 잭 니콜슨, 해리슨 포드, 미아 패로 및 에이드리언 브로디 등의 이름을 들었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에 나온 페이 더나웨이 이름이 나오자 “아이고 맙소사”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심리묘사에 뛰어난 폴란스키의 영화는 공포와 집념 그리고 인간 마음의 탈선 특히 성적 일탈 등을 자주 다루는데 ‘물속의 칼’과 카트린 드뇌브 주연의 ‘혐오’ 그리고 자기가 주연도 한 ‘세입자’ 및 ‘로즈메리의 아기’ 등이 모두 그런 영화들이다. 그의 영화들은 보는 사람의 심리를 불안하게 만드는데 그의 소년시절의 악몽과도 같은 경험이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인터뷰 후 폴란스키와 악수를 나누면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가 “한국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하자 폴란스키는 “그러냐. 한국 영화 좋다는 것 알고 있다”면서 반가워했다.
< 편집위원/ hipark@koreatime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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