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시엽
(W.A. 고무 실험실장)
귤나무여! 눈을 씻고 보고 또 보아 도 잎사귀뿐이네. 골 프공만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 야 할 이 가을에 이 게 무슨 변고더냐.
때가 되면 꽃이 피 고 열매를 맺는 자 연의 섭리를 털끝만 치도 의심치 않았는 데 이토록 큰 실망 을 안겨주다니……. 좀 부풀려 표현하자면 배신감마저 느껴지 는구나. 이사 들고 지난 8개 성상 은밀하게 내가 얼마나 너를 아끼며 즐겼는지 너는 잘 알고 있잖아. 처음 너를 맛본 이래 나는 측근 몇을 제하 고는 집 뒷마당 한구석에 자리한 너의 존재를 쉬쉬하며 비밀에 부쳐왔다.
달콤새콤한 네 맛 에 쏙 빠져 너를 독점하고 싶은 욕심이 솟은 탓이었지. 잘 익은 싱싱한 귤을 나무에서 직접 따 먹는 맛은 그야말로 입맛이 곧 살맛이었다. 그래서 나의 한 측근은 너 없이는 내가 살맛 이 떨어져버릴 것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설마 네가 이 소리를 엿듣고“ 나 없이 한번 견뎌 보 라”고 올해 소출을 유예시킨 건 아니겠지. 이 모든 나의 불평도 너에게는 다 헛소리 요, 넋두리처럼 들릴 것 같아.
아무래도 답답 한 네 속사정을 들어주는 것이 주인 된 도리 가 아닐까 싶네. 네 소리를 한번 들어 보자. 나를 끔찍이 아꼈다는 나의 주인이여! 그 동안 그저 입으로만 나를 끔찍이 아껴왔네. 먹는데 아이 어른 구분이 어디 있으랴마는 나를 아끼며 즐기는 모습을 보면 참 어린애 같았어. 서둘러 따 먹고 싶은 충동을 용케 누 르고 내가 노랗게 무르익는 12월까지 참고 기다리며 내게 다가오지 않았어. 맘에 쏙 드는 잘 익은 놈을 두엇 골라 껍 질을 벗겨 입안에 넣고 우물거릴 때의 모습 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어. 인간이 아주 하찮은 일로도 쉽게 행복을 느끼는 존 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지.
작년에는 내가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 소출이 예년에 비해 반도 채 안 되었던 것 같아. 몇 개 따 먹고 나서 재고조사를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글쎄 모두 백 개나 달렸 을까.
그걸 새해 벽두까지 버티며 즐기려니까 재고조사를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두 번 재고에 차질이 생긴 적이 있었지. “정원사가 잔디 깎으러 왔다가 삥땅을 했 나?” 하고 중얼댔었지.
뒤늦게 새들의 범행으 로 밝혀져서 참 다행이었어. 새들 입맛도 사 람 뺨쳐. 나무 밑에 새가 쪼아 먹다 버린 귤 이 없었다면 정원사가 누명을 쓸 뻔했거든. 그런데 왜 새삼스레 실망감을 드러내는지 도통 모르겠어. 이미 봄부터 빤히 알고 있었 잖아. 꽃향기 한창이던 봄철, 꽃도 못 피우고 벌서듯 서 있는 나를 보고 뭐라고 중얼댔지?
“이게 늙어서 갈 때가 됐나? 오렌지 향기 가 바람에 날리기는커녕 꽃도 안 피네.” 그때 열매 맺지 못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왜 가을을 기다렸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는 찍어버려야 한다는 소리 듣고 주인 잘못 만나 내 신세 망치는구나 했었지. 나도 사랑과 정성을 먹고 사는 생명체거 든.
비료는커녕 물도 스프링클러에 떠맡겨놓 고는 목이 타는 나에게 물 한번 흠뻑 줘 봤 어? 귤나무인줄만 알지 내가 무슨 품종인지 알기나 해? 재배법에 관해서도 깜깜절벽이잖 아. 나를 위해 해준 게 뭐 있냐고. 그러고도 무슨 염치로 때 되면 열매를 거둘 생각을 했 어? 때 맞춰 뭘 좀 제대로 먹여줘야 나도 제 구실을 하지. 건강도 건강할 때 잘 돌보고 차도 잘 굴러 갈 때 잘 정비해 주어야 고장이 안 나는 법 아냐? 심기만 하고 돌보지 않는 것은 직무유 기야. 수확이란 뿌린 시간, 땀, 정성의 열매를 거두는 행위야. 돌아가신 모친께서 하시던 말 씀 벌써 잊었어? “생명 있는 것들은 아무렇게 키우는 게 아 니다. 사랑으로 돌볼 생각 없으면 애당초 키 울 생각 마라.” 주인 잘못 만난 귤나무여!
네 속사정을 듣 고 나니 너에 대한 실망감, 배신감이 모두 나 의 죄책감으로 변해버렸네. 돌아보니 모두 내 탓이야.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죄하겠어. 귤나무여! 미안하다. 한번만 봐 다오. 너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새 주인으로 거 듭날 터이니 부디 다시 나의 희망이 돼 주렴. 내 약속을 믿고 내년에는 가지가 찢어지게 풍성한 열매를 맺어다오. 이웃과도 함께 나 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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