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스페인의 산세바스찬 국제영화제 에 참가해 본 영화들 중 지금까지 그 잔상 이 뇌리에서 맴도는 3편의 영화가 있다. 한 국의 김기덕 감독이 만든 ‘아멘’ (Amen)과 영국의 베테런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의‘ 깊 고 푸른 밤’ (The Deep Blue Sea) 그리고 스 페인의 데이빗 트루에바 감독의 ‘마드리드, 1987’ (Madrid, 1987).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일종의 사랑에 관한 영화다. 아니 사랑이라기보다 집념에 관한 영화라고 해야 옳겠다. 하기야 사랑치 고 집념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느냐 만은. 내가 이들 세 영화를 아직까지 잊지 못하는 까닭도 아마 바로 이 집념이라는 영화들의 주제가 날 붙잡고 놓아주질 않아서 인지도 모른다.
‘아멘’ (사진)은 김기덕이 유럽에서 찍은 저예산 영화로 연락이 두절된 화가 애인을 찾아 프랑스에 온 젊은 여인(김예나)의 유 럽 여정기다. 괴물 김기덕 본인을 닮은 괴이 하고 변태적인 영화로 공포영화 같기도 한 거의 초현실적 분위기를 지닌 아름다운 작 품이다. 영화 전체를 손에 든 카메라가 프랑 스와 이탈리아를 오가며 애인을 찾는 여인 의 뒤를 스토커처럼 쫓아가고 있다.
여인은 파리에 살던 애인(파리에서 그림 을 공부하던 김기덕의 경험)이 베니스로 갔 다는 말을 듣고 베니스로 가는 기차를 탔다 가 기차 안에서 방독면을 쓴 괴한에게 겁탈 을 당한다. 괴한은 여인의 신발과 짐을 챙겨 사라진다.
베니스에서도 사라진 애인을 찾아 프랑 스의 아비뇽으로 가는 여인의 뒤를 방독면 을 쓴 괴한이 계속해 따라가면서 여인의 마 음을 어지럽힌다. 괴한은 이번에는 여인의 신발과 물건을 하나씩 돌려준다. 그리고 여 인은 자기가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예수 수태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로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알아주는 김 감독의 실험정 신이 강한 예술혼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깊고 푸른 밤’은 1950년대 런던을 무대 로 한 테렌스 래티건의 연극이 원작. 젊은 전직 전투기 조종사 프레디를 맹목적으로 사랑, 나이 먹은 귀족 고등법원 판사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간 젊고 아름다운 부인 헤스 터(레이철 바이스)의 죽음마저 불사하는 사 랑의 드라마다.
헤스터는 부와 안락과 사회적 지위 그리 고 자존마저 버리고 후진 아파트에서 프레 디와 동거하는데 문제는 헤스터의 프레디에 대한 사랑이 안정감이 없는 프레디의 헤스 터에 대한 사랑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 프레 디의 손길이 몸에 닿기만 해도 성적 쾌감에 자지러지는 헤스터는 그래서 자살까지 시도 한다. 결국 이 때문에 헤스터에겐 감당키 힘 든 비극이 일어난다.
과연 사랑과 집념의 한계는 무엇이며 남 녀 간의 과다한 집념이란 사랑의 기형적 모 습에 지나지 않는가를 묻게 된다. 이 연극은 지난 1955년 비비안 리 주연으로도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바이스의 연약한 모습과 낮은 목소리 때 문에 그의 집념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연민스럽고 강렬히 내연하는 연기를 한다. 어두운 갈색 위주의 촬영이 좋고 새뮤얼 바 버의 바이얼린 협주곡이 작품의 분위기에 아름답게 기여하고 있다. 감정적 충격이 강 한 작품이다.
‘깊고 푸른 밤’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로맨틱하게 쓰여진 유부녀 로라 와 유부남 의사의 짧은 사랑을 그린 데이빗 린 감독의 ‘짧은 만남’ (Brief Encounter)을 연상케 한다.
‘깊고 푸른 밤’처럼 체임버 피스인 ‘마드 리드, 1987’은 뜨거운 여름 주말 아파트의 욕실에 갇힌 알몸의 중년의 언론인 미겔과 젊고 아름다운 언론학도 앙헬라 간의 언어 의 결투를 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 간의 치열한 설전으로 이어지는데 스릴마저 느껴지는 언어의 마법을 만끽할 수 있는 영 화다.
앙헬라는 공부를 위해 미겔에게 면담을 요청, 카페에서 만난다. 냉소적인 미겔은 처 음부터 다짜고짜 앙헬라에게 도전적이요 적 의마저 있는 말들을 집어 던진다.
미겔의 나 이 또래인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의 앙헬라 에 대한 전의가 돌아올 수 없는 젊음과 아 름다움에 대한 시기와 시샘과 부러움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미겔은 이어 앙헬라에게 자기 친구의 빈 아파트로 가자고 제의한다. 아파트 욕실에 서 샤워를 하는 앙헬라와 그를 따라 들어 간 미겔은 욕실의 문이 밖에서 잠기는 바람 에 둘 다 알몸으로 수인의 신세가 된다. 미 겔의 앙헬라의 젊은 육체를 동경하는 시선 이 마치 먹을 것 졸라대는 아이의 투정처럼 측은하게 느껴진다.
이때부터 둘 간의 맹렬한 설전이 시작된 다. 욕망과 영감과 재능 그리고 직업적 견 해를 비롯해 정치, 사회, 문화, 학문, 문학 및 세대 차와 삶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충 돌하면서 언어의 불꽃이 튄다. 그리고 둘은 모두 이 감정적 알력에서 살아남으려고 안 간힘을 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의 종 말이 한기가 나도록 공허하다.
<박흥징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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