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문인회의 웹 사이트 문학 강좌에서 ‘시 창작의 비법은 없다’라는 고 박재삼 시인의 글을 읽게 되었다. 고인이 되신 시인의 천성과 같이 소박하면서도 진실한 내용을 짚어 가노라니 마치 선생님과 마주 앉아있는 감회가 든다. 우연히 뵙게 되었던 지난날이 주마등 같이 스치고 간다.
나는 삼 면이 푸른 바다로 둘러싸인 태안반도의 대자연 속에서 다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상속자인 동생이 여섯 살 때 36세의 고귀한 젊음을 접고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다재다능하시고 핸섬하고 부족함이 없으셨던 아버지. 그 뒤로 나는 결혼해서 10년 동안 친정을 돌보지 못했고 세상을 몰랐던 나는 어린 동생의 재산 문제로 10년 동안 소송이라는 큰 짐을 안게 되었다. 나의 변호인은 소설로 써서 TV 드라마로 출시하면 베스트셀러가 된다고 대필을 해서라도 하라고 극구 권할 만큼 소설로도 다 못할 나의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민형사 소송 13건은 다 승소했지만 늦은 결혼의 꿈은 산산이 흩어지고 건강을 잃었으며 심신 양면 모든 것을 잃었다는 절망만을 안고 있을 즈음 한 신문사에서 시조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주체할 길 없던 염세 속에 민족시로 마음을 달래고는 있었지만 등단의 욕심조차 없이 토요일마다 저명한 시인들이 심사하던 지면에 투고하여 이태극 박사님의 추천으로 등단이 되었고, 별 생각 없이 신춘문예에 응모한 것이 입선이 되었다.
당시 나는 지극하신 어머님을 닮아 쑥밭 같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 같이 자신의 영역을 지켜주었던 사랑하는 아이들의 10년 공백을 메워 주고자 일편단심으로 교육 문제에 마음을 다하고 있었기에 박재삼 선생님을 잘 알지 못했다.
토요일마다 내가 투고한 신문 지상에서 심사하시는 시평을 대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박재삼입니다” 하시며 내 이름도 송구스럽도록 더듬으셨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선생님은 “신춘문예 작품이 좋았는데 당선작이 왜 안 됐는지 궁금하지 않는냐”며 YMCA에서 바둑 관전평을 쓰고 있으니 거기서 만나자고 하셨다.
선생님께선 심사 때마다 나가지만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보다 같이 심사하는 사람이 뽑고 싶어 하는 작품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서 양보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며 미안해하시던 소박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며칠 뒤 식사를 얻어먹었으니 갚아야겠다고 전화를 주셨다. YMCA 구내식당에서의 소박한 식사였는데 약속 날 시간도 늦어 YMCA에 들어서니 수리중이란 푯말이 붙었고 의자 하나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선생님은 작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죄송스러움이 겹쳐 선생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정평이 있으시다고 말하자 “내가 뭘 착해요.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똑같은데 나 좋은 사람 아니에요” 하셨다.
그날 선생님께서 낙관이 선명한 시집 ‘비듣는 가을 나무’를 주시며 “이 선생과 이렇게 만나다가는 몇 번이나 만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어요” 하며 혼잣말로 하셨다. 병고에 시달리고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선생님께선 자유롭지 못한 몸과 마음으로 늘 죽음을 예견하셨던 것이 아니었던가 무심히 들었던 말이 이제 와서야 생각이 난다.
그 후 시조 대사전 출판 기념회로 세종 문화 회관에 입장하기 위해 많은 문인 선배님들과 줄을 서 있는데 “이 선생” 하고 쨍하게 울리는 독특한 음성을 듣고 돌아보니 대여섯 사람 뒤의 인파 속에 선생님이 서 계셨다. 그것이 선생님을 뵌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는 그 후 미국으로 왔으며 신문 지상으로 선생님의 작고 소식을 읽었다. “슬픔의 연금술사”라는 평가를 듣도록 유년 시절부터 서럽고 가난한 삶을 사신 한 많은 시인. 어떤 계파에도 몸을 두지 않고 전통적 가락과 향토적 서정의 운율에 맞춰 서민 생활의 고단함을 눈물로 엮어 가신 선생님. 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은 순수함의 극치를 보여주며 우리 민족의 서정과 한의 경지가 유감없이 표현된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아있다.
우리 민족의 한을 절묘한 가락과 운율에 맞춰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은 시인. 서러울 만큼 순수하셨던 선생님의 천상명복을 빌어본다.
이택제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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