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슬림 극렬파 테러활동 규명의 관건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이해
모슬림의 2대 종파인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는 기독교의 장로교라던가 감리교와 같은 교파의 차이하고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상대방을 이교도시 까지는 하지 않지만 이슬람의 정통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적대시하여 무력분쟁으로 까지 가는 경우가 있을 정도이다.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하는 파로서 전체 무슬림인구의 80~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시아파는 이란이 대표적인 국가인데 무슬림 인구의 10~20%를 차지한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후, 후계자로 추대된 캘리프(caliph=敎主)의 4대째 계승자가 추대되면서 종파가 갈리기 시작했다. 초대서부터 3대까지는 모두 무함마드하고 혈연관계는 없는 사람들로서 두 사람은 무함마드의 양아버지고 한사람은 친구였다. 제4대째 캘리프는 조실부모한 무함마드를 부모대신 길러준 삼촌의 아들인 ‘알리’라는 사람이었다. 무함마드는 생전에 삼촌의 빈곤을 덜어 주기위해서 알리를 양자로 삼고 같은 식구로 데리고 있었다. 즉 알리는 조카이자 동시에 양자였으며 혈연으로는 제일 가까운 존재였다.
이때부터 일부 모슬림은 무함마드의 혈통을 캘리프로 섬겨야하며 그전 3대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하게 되어 종파가 2개로 분열이 되었다. 이 혈통파가 ‘시아파’이며 3대까지도 인정하는 파가 ‘수니파’가 된 것이다. 지금 이락은 수니파의 나라인데 ‘시아파’가 점유하고 있는 지역도 어지간하며 한때는 이란과 내통하여 이라크를 배신하는 음직임을 가졌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시(Iran-Iraq War, 1980.9.~1988.8.)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모슬림은 배타적이며 비타협적인 사람들이라는 평을 듣는데, 그들은 이슬람교는 종교로서는 더 이상의 것이 없는 완벽한 것이고, 최종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종교라고 확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들은 남과 나(우리)의 구분을 잘하며 나를 ‘선(善)’으로 규정하고 남은 모두 “악’으로 규정짓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눈으로 볼 것 같으면 ‘알라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큰 죄이며 지옥에 갈 운명을 가진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아랍세계에서는 필연적인 현상으로써 아랍기독교인과 이슬람 교인간의 분쟁이 가끔 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소수파인 기독교인들은 유럽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도 아랍인들의 서방 기독교인에 대한 반발을 증대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는 것이다.
Gulf 전쟁은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10만 대군을 동원해서 같은 아랍국가이자 인접국인 쿠웨이트를 무력점령하게 되어 국제연합(UN)이 다국적군 파견을 결정하였으며, 그 결정에 따라 미 공군이 1991년 1월 17일 이라크를 폭격함으로서 시작된 전쟁이다. 이때 이라크에서는 쿠웨이트 침공에 동원된 병력을 사우디 쪽으로 돌려 사우디를 공략할 기세를 보였으므로 미군은 사우디와 합의하에 사우디에도 병력 전개를 하였고 공군기지도 사용을 하였다. 사우디는 ‘메카’와 ‘메디나’라는 이슬람의 성지(聖地)가 있는 고장이기 때문에 이슬람세계에서는 외국군이 발을 디디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미군이 주둔을 하였다는 이유로 일부에서는 미국을 비난하였다. 특히 모슬림의 극렬분자이며, 후일 미국 9.11사건의 주모자로 밝혀진 ‘오사마 빈 라덴’의 미국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고조 되었다는 것이다. ‘빈 라덴’은 무슬림 테러 조직의 두목으로서 평소 미국을 ‘이스라엘’의 동조국으로 규정짓고 적대시하여 오던 자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이슬람세계가 비교적 조용했으나 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국가가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 문제’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이슬람 계열 테러활동이라던가 중동문제는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원점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만치 우선 팔레스타인 문제의 배경부터 짚고 넘어가면 한다.
‘팔레스티나’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유태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이야기한다. 지리적으로는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요르단강까지와 변두리 각 지역을 합친 지역인데,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명칭은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에서 이 땅을 그렇게 호칭한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비잔틴 제국(395~1453)시대에는 ‘팔레스티나’(라틴어 표현)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기원전 11세기에 유태인들의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졌으나 기원전 922년에 내란으로 남북으로 분열이 되고 나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루샤, 마케도니아 제국 등 인근 강대국이 번갈아 점유를 하였었다. 기원전 143년에는 드디어 로마제국의 속주(屬州)로 전락 되었는데, 기원후 132년에는 메시아를 자칭하는 Bar Kokhba라는 유태인이 나서서 독립군을 편성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팔레스타인 일부를 점유하고 유태인 독립 국가를 만들었다. 이에 맞서 로마제국에서는 가차 없이 진압을 하고 무자비한 탄압을 하게 되어 유태인들은 나라를 잃은 채 팔레스타인에서 피난 나와 세계각지에 흩어져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이산되어 거주하는 나라 잃은 유태인들, 또는 그 현상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한다.
역사의 흐름과 같이 지리적인 팔레스타인의 경계선은 고무줄 모양 자주 늘었다 줄었다 하였는데, 1920년 영국의 현지 신탁통치 기구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영토(West Bank, Gaza Strip)를 합친 지역을 팔레스타인이라고 확정지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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