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비행기로 북향, 1시간쯤 날으니 창밖으로 산 세바스찬의 초승달 모습의 해변이 곱게 여객을 맞는다. 여장을 푼 이튿날 앞뒤에 코카콜라라고 쓴 빨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이겔도산에서 내려다 본 산 세바스찬은 단아하니 아름다웠다.
산을 내려와 바닷가 암벽에 세운 3개의 커다란 철제조각 ‘바람 빗’ 앞에 서서 해풍으로 머리를 빗었다. 지난주 ‘바람 빗’의 작가 루이스 페냐 간체귀가 ‘바다라는 절대에서 끝나는 도시’라고 말한 산 세바스찬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사진).
이겔도산 건너편의 우르굴산 위에 우뚝 선 산 세바스찬 수호성인이 지켜주고 있는 산 세바스찬은 고풍이 온몸에 배어 있었는데 아기자기하고 올망졸망하니 작고 예뻐 단번에 정이 갔다. 숙소인 아파트에서 영화제 본부인 쿠어살센터 그리고 센터에서 다리 건너편의 올드타운까지 어디고 모두 걸어 다닐 수 있을 만큼 작아 여객에겐 안성맞춤의 도시다.
깨어진 종소리를 내는 산타마리아 성당이 있는 올드타운의 좁은 골목 양옆으로 늘어선 바에 들러 바에 늘어놓은 타파스를 골라 접시에 담았다. 타파스는 빵 위에 문어와 참치 등 해산물이나 치즈와 올리브 등을 올려놓은 일종의 스낵인데 맛있다. 내가 들른 아라라 바의 사람 좋은 중년의 종업원은 “그라시아스”라고 하는 내게 “고맙습니다”라고 서툰 한국말로 답했다.
도시를 걷다 보면 거리 이름과 도로 표지판 등이 스페인어와 바스크어로 써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영화제 개막식도 두 언어로 진행됐다. 산 세바스찬은 바스크어로 도노스티아라고 부른다.
프랑스 남쪽 국경과 접한 산 세바스찬은 바스크 컨트리다. 스페인과 언어가 완전히 다른 바스크의 소수 과격파들은 오래 전부터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고 투쟁해 왔는데 요즘은 잠잠한 편이다. 아파트의 여주인도 바스크인데 “과격분자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살인을 했다”면서 “그러나 대부분의 바스크들은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원치 않는다”고 알려줬다.
도시는 곳곳이 바들로 붐비는데 저녁부터 밤늦도록 노천 바에서 맥주나 포도주를 마시며 담화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여유 있는 삶이 부러웠다. 게다가 이들은 낮에는 1시간여의 시에스타를 즐기니 도대체 일들은 언제 하나 하고 궁금해진다. 삶을 즐기면서 사는 것 같았다.
‘뻬르돈’과 ‘돈데’ 그리고 ‘그라시아스’를 주단어로 써가면서 산 세바스찬을 샅샅이 헤집고 다닌 뒤 숙소서 버스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남불의 해안도시 비아리츠를 찾았다. 마치 한국의 동해안처럼 파도가 사나운 비아리츠 해안 이름은 바스크 해안.
바닷가 암석 위에 세운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동상의 등뒤가 모진 해풍에 성모의 아픔같은 녹이 슬었다. 해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도 바스크 컨트리다. 바스크들은 흰옷에 빨간 허리띠와 스카프가 특징인데 비아리츠의 한 노인이 데리고 나온 개의 목에 빨간 스카프가 매어져 있다.
영화 관람과 도시 관광의 강행군 속에 다음 목적지인 팜플로나에 들렀다. 숙소서 버스로 1시간 거리인 이 도시도 역시 바스크 컨트리다. 팜플로나는 매년 7월 좁은 에스타페타 골목에 황소들을 풀어놓고 남자들이 달려오는 소떼 앞에서 뛰어 달아나는 행사로 유명한 곳이다. 비록 황소들은 안 보이지만 나는 에스타페타 골목을 걸으면서 달리는 황소들의 발굽소리를 환청했다.
황소들의 질주가 시작되는 출발지로부터 800미터 떨어진 종착점인 ‘라 플라자 데 토로스’(황소 광장) 투우장 앞에는 헤밍웨이의 흉상이 있다. 지난 1923년 헤밍웨이가 기자로 팜플로나를 방문, ‘황소 달리기’에 매료돼 이 얘기를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 적어 도시 관광에 큰 기여를 한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점점 투우를 금지하는 법안들이 통과돼 바르셀로나도 지난 25일로 마지막 투우를 치렀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이 열광하는 ‘황소 달리기’ 행사는 계속 된다고.
내친 김에 역시 숙소서 버스로 1시간 거리인 빌바오를 찾아갔다. 구겐하임 뮤
지엄 때문인데 이 곳 역시 바스크 컨트리다. 그러니까 나의 이번 여행은 바스크 컨트리 여행인 셈이다.
빌바오 강가의 구겐하임 뮤지엄은 LA 다운타운의 디즈니 콘서트홀을 설계한 프랭크 게리가 설계했다. 디즈니 홀처럼 은빛 건물인데 멀리서 보면 둘이 쌍둥이처럼 보인다. 인상 깊었던 작품은 리처드 세라의 거대한 철제조각 ‘매터 오브 타임’. 큰 전시실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데 나는 동아리를 튼 철물구조 사이를 걸으면서 공간의 물질감과 조각의 성질을 잠시 감각했다. 잭슨 폴락의 그림도 구경했다.
산 세바스찬에 도착한 뒤 2~3일 간은 흐리고 비바람이 부는 날씨. 이어 햇볕이 나자 쿠어살센터 뒤편 해변에는 젖가슴을 드러낸 여자들이 일광욕을 즐기면서 남의 시선에 아랑곳도 않는다. 동화 속 소국 같은 산 세바스찬을 걷다보면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아늑하고 포근해 한 며칠 지나니 내 도시 같이 느껴진다. 아디오스 !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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