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운동장을 생각하면 먼저 칸나가 생각난다. 텅 빈 운동장 가에 피어 있던 붉은 칸나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꽃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된 문패를 달았던 읍내의 그 빨간 기와집에도 칸나가 피어 있었다. 방 세 칸짜리의, 참으로 좁은 집이었다. 마당은 더욱 좁았고 꽃밭은 더더구나 좁았다. 나중에 방을 한 칸 달아내면서 한 귀퉁이가 잘려나간 그 좁은 꽃밭에도 여름이 오면 어김없이 칸나가 피었다. 허리가 긴 꽃대에서 길고 통통한 꽃자루가 솟아오르고 그 살갗에 햇빛이 닿으면 꽃잎이 한 장씩 몸을 젖혔다. 여름 햇빛 속에 꼿꼿이 피어오르던 붉은 칸나는 장맛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작은집의 마당을 휩쓸고 지나간 다음날 아침이면 꽃잎이 한 장씩 찢겨져 있기도 했다. 칸나는 바지랑대로 올린 빨랫줄보다 조금 낮게, 촘촘한 꽃잎을 피우고 있는 달리아보다 조금 높게 피어나곤 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셨다. 아버지는 취기로 돌아오시는 날이 많았다. 어쩌다 술을 드시지 않고 자전거에 석양을 싣고 돌아오시는 날이면 아버지는 꽃밭 앞에 자전거를 세워놓으시고 아버지 키와 비슷한 칸나를 한참씩 바라보셨다. 아버지가 칸나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던 적은 없었다. 다만 그렇게 칸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기억이 아버지는 칸나를 좋아하셨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할머니의 수국처럼, 어머니의 모란꽃처럼 말이다.
어느 해 여름의 끝이던가. 텅 빈 운동장에서 여름내 혼자서 피고 지는 일에 쓸쓸해하던 칸나가 꽃피우기를 그만둘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숙직을 서시는 아버지의 저녁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있던 해가 플라타너스 가지를 길게 끌며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는 참이었다. 두레박우물 곁의 숙직실에 가보았지만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의 낡은 구두 한 켤레가 한쪽에 벗어져 있고 초라한 국방색 담요 한 장이 방구석에 개켜져 있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학교는 기이한 정적이 맴돌았다. 숙직실 바닥에 도시락을 밀어 넣고 돌아서는데 어느 교실에선가 풍금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 풍금소리를 좇아갔다. 아버지였다.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본 아버지는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하늘색 고무슬리퍼를 신은 발로 풍금의 페달을 밟으며 “푸른 하늘 은하수”인지 “낮에 나온 반달”인지를 치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인 것처럼 낯이 설었다. 발끝의 페달로 바람을 모아 떨림판을 떨리게 하여 내는 풍금소리가 그처럼 서글픈 소리라는 것을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한낮의 교실에서 듣던 풍금소리는 날아다니는 새들처럼 경쾌했는데 저녁에 듣는 아버지의 풍금소리는 서글프기 짝이 없는 음색이었다. 격자유리창의 교실 안에는 슬픈 음계들만이 가득했다. 어린 마음에도 그 교실 문 너머의 아버지를 아는 척 할 수 없어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그 복도를 빠져나왔었던 것 같다. 석양 속에 붉은 꽃잎을 통째로 담근 채 서있던 키 큰 칸나들을 뒤로 하고 운동장 한가운데를 벗어날 때까지 아버지의 풍금소리는 내 뒤를 따라왔다. 아버지는 열아홉 살부터 선생님을 하셨다. 해방 직후에 세워진 허술한 2년제 사범학교에서 풍금의 기초만을 터득한 채 졸업을 하신 아버지는 음악을 아주 좋아하시던 분이셨다.
그 오래된 기억 속의 풍금소리가 다시 기억난 것은 지난 해 초여름, 아버지의 마지막 호흡을 지켜보던 병원에서였다. 먼 길을 떠나기 위한 아버지의 호흡은 약하고도 느리게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그 흐려지는 호흡 속으로 그날의 풍금소리가 들려왔다. 가파르던 한 생애를 간단없이 마치고 눈을 감는 아버지의 모습은 부드럽고 평온했다. 영원한 작별을 위해 온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몸에서 다리를 만져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살짝 저시는 분이셨다. 그 굵기가 서로 다른 다리로 애써 균형을 잡으며 살아오신 아버지의 생을 생각하니 애써 삼키고 있던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왔다.
어쩌면 내 아버지의 생은 낡고 이가 빠진 풍금처럼 온전한 음계를 이루지 못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균형을 잃은 두 다리로 견뎌내기엔 세상의 바람은 너무 완강한 것이었으리라. 나는 아버지가 가고 없는 세상에서 취기로 돌아오던 아버지를 오롯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취한 아버지의 행보를 지키며 느리게 바퀴를 돌려 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아버지의 분신 같던 그 자전거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걸면 날씨 이야기며 절기 이야기를 자주 꺼내시던 아버지가 영원한 절기 속으로 떠나버리신 후,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했다. 아버지가 있는 사람과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만이 존재했다.
여름과 가을의 짧은 동행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조석으로 싸늘한 기운이 느껴져 달력을 확인하니 처서도 지난 지 오래고 절기는 백로에 닿아 있다. 어정칠월이니 동동팔월이니 하는 절기 이야기를 배운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 오늘 같은 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그래서 전화를 드렸다면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화두로 꺼내셨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쌀쌀허지야? 한낮에 잠시 내리쬐는 노염으로 벼이삭이 패는 시기구나, 늦은 햇빛을 얼마나 쬐였느냐에 따라 거둬들이는 쌀섬이 차이가 나는 법이지. 거긴 비가 온다구? 백로에 비가 오면 곡식도 겉여물고 과실에서는 단물이 빠져나가서 좋지 않지. 너 백로 다음으로 오는 절기가 뭔지는 아니? 이십사절기 중에서 열여섯 번째인 추분이란다. 인생에도 절기가 있는 법이니라. 너도 그 인생의 절기를 잘 짚어보며 지혜로운 한 생을 살아야 한다.”
비가 내리고 있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는 수숫대 같은 칸나들이 피어 있을 것이다. 치열했던 한여름을 살아낸 표적으로 붉은 꽃잎의 기억만을 남긴 채 지상에서 사라져갈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시 아버지가 그리운 계절이다. 한 옥타브 낮게, 반 박자 느리게, 슬픈 곡조를 만들어내던 바람의 악기, 아버지의 풍금소리도 그리운 계절이다.
(pinkmd411@hanmail.net)
김용미
수필가 /포토맥,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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