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30 주년이 되던 1975년, 자가용이나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나는 서울의 한 일간지에서 4년차 기자로 뛰고 있었다. 광복절이 코앞에 다가온 어느 날 아침, 문화부장이 다급히 나를 호출했다.
“광복 30 주년 기념특집인데 사정이 급해요. 내일 아침까지 원고를 넘겨줘야겠어.”
특집의 내용은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이 중고교 교과과정을 통해 그들이 저지른 만행과 치욕의 역사를 어떻게 후세들에게 교육하는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식민통치와 제국주의 사관을 호도하며 과거 청산에 인색한 일본과 나치즘의 악몽을 자성하고 철저하게 교훈 삼는 독일을 대비시키는데 있었다.
일본 편 특집은 P차장에게 맡겨졌고 독일 편이 나에게 떨어졌다. 원고지 20 매의 중량급 기획물이었다. 그저 공휴일이어서 반갑던 광복절이 바야흐로 나의 역사 속에 들어와 나의 광복절로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취재 차량은 일찌감치 모두 징발 당한 터여서 발로 뛰는 도리밖에 없었다. 서둘러 독일사 전공의 대학 교수를 만나 독일의 역사교육 전반은 취재했으나 애초 계획이 빗나갔다. 그 교수는 내가 구상했던 독일 중등 교육용 역사 교과서를 소장하고 있지 않았다.
“어디 가서 구하나?” 고민을 하는데 독일문화원이 퍼뜩 떠올랐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달려갔다. 천만다행 역사 교과서가 거기 있었다. 한인 사서의 도움으로 2권의 교과서를 대출 받는 순간, 나는 전투에 나선 장수가 천군만마를 얻은 듯 기뻤다.
그 기쁨도 잠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떠오르며 교과서가 애물단지로 돌변했다. 나는 구슬 한 개도 제대로 꿸 자신이 없었다. 고교 일학년 때 배운 독일어 실력으로는 한 문장을 붙들고 밤새 씨름할 판이었다.
아무렴 누울 자리도 보지 않고 다리를 뻗었을까?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믿는 구석’이 서울 어느 구석에 있는지를 알아낼 재간이 없었다. ‘믿는 구석’은 S대 독문과 출신인 입사 동기 L이었다. 그는 자신을 하늘 같이 믿고 내가 일을 벌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어느 술좌석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버스를 타고 정릉 그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그는 예상대로 귀가 전이었다. 아파트 입구의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점심, 저녁도 거르고 가게 주인과 맥주 다섯 병을 비우며 그를 기다렸다. 자정이 다가오면서 L이 술에 떨어져 귀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야간통금이 있던 시절이어서 택시가 끊기면 여관 신세를 져야했다.
막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어둠을 뚫고 L이 갈지자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자정이 임박한 한여름 밤 자신의 아파트 입구에서 도깨비처럼 불쑥 출몰한 나를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L을 앞세워 그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혀가 돌아간 L을 앉혀놓고 반쯤 마비된 그의 이성에 호소했다.
“내일 나 사표 쓰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너 졸지 말고 정신 바짝 차려.”
나의 주문에 따라 그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독일 교과서를 번역하기 시작했다.
“나치스와 독일은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독일 역사 교육의 기본 방침이다. 나치스 권력의 악마성에 생명을 걸고 저항한 독일인의 양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참다운 독일 정신은 나치스에 대한 레지스탕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
번역을 하다 코를 골며 통나무처럼 허물어지는 그를 끌어안아 바로 세우기를 대여섯 차례.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한 대피호 속에서 자살했다. 5월7일 나치스 독일은 종말을 고했다. 패망은 당연했다. 이 때문에 일본이 맛본 원폭세례를 면할 수 있었다.”
겨우 세 시간 눈을 붙이고 L과 함께 택시를 잡아타고 출근했다. 원고지 한 장을 메우기가 무섭게 편집자가 낚아채가는 가운데 세 시간을 꼬박 앉아 20매를 완성했다. 그날 오후 파란만장한 나의 역사를 간직한 8.15 특집이 독일 역사교과서 표지 사진과 함께 잉크 냄새 물씬 풍기며 신문에 실려 나왔다.
“일본도 독일의 역사교육을 본받아야 할 터인데…… “ 독일 편을 읽고 난 일본 편 담당 P차창의 그 때 그 한마디를 오늘의 일본을 향해 외쳐보고 싶다.
황시엽 W.A. 고무 실험실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