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 밸리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딸애네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그애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때 함께 투자를 해서 집을 샀었는데 부동산 불경기가 닥치면서 그애네도 피해가지 못하고 결국 집을 매도하게 되었다. 자동차로 한 두어시간이면 갈수 있는 곳에 있어서 우리 가족들은 시간만 나면 그곳에 가서 모이곤 했다.
카멜 밸리는 바닷가 비치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경치가 수려하고 비치엔 안개가 끼어 있어도 그곳 만큼은 날씨도 좋고 아늑해서 주말 별장으로는 정말 제격이었던 곳이다.
우선 그곳은 햇볕이 다르고 공기가 달랐다. 햇빛은 더 눈부시고 공기는 달콤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안개가 끼어 있다가도 아침 열시경이면 안개는 다 걷히고 쪽빛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진한 커피 한잔을 만들어 가지고 드넓은 데크에 나가면 앞에는 짙푸른 산과 계곡과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지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이곳이 정말 별천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날 남편이 말했다."만약에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가장 가까운 곳이 아닐까?"라고.
딸애 시어머니였던 로라는 특별히 이곳을 사랑했는데 어릴 때 한동안 이 카멜에서 산 적이 있었고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전까지 역시 이곳에서 사셨기 때문에 유난히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로라는 남편이 유명한 변호사였기 때문에 일생을 가정부와 유모와 정원사까지 거느리고 산 전형적인 미국 상류사회의 부인이었다.
금문교를 건너면 밀밸리란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은 백인촌이면서 미국에서도 가장 인컴이 높은 지역에 속한다. 우리 사위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들 가족이 오십년도 더 산 대저택이 로라가 죽은 후 시장에 매물로 나왔는데 워낙 덩치가 커서 남겨진 5남매의 자식들이 그것을 처분 하는데도 의견이 분분해 정말 자식을 위하는 진정한 유산은 무엇일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어느 땐 부모가 남긴 유산이 득이 될수도 있겠으나 어느땐 형제들을 갈라놓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멜 시내는 번지수가 없고 거리엔 신호등마저 없어서 관광 시즌에는 스톱 싸인만 보고 운전을 하려면 자동차가 홍수를 이룬다. 아마 이런 도시는 미국 전체에서도 이곳 뿐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수천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살고 있고 한 폭에 수천달러가 넘는 고가의 그림들이 걸려있는 화랑들이 즐비하며 동화 속에 나올 듯한 집들이 바다를 끼고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이곳은 별천지임에는 틀림 없다.
우리 부부가 결혼 10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을 처음 찾았을때, 나는 늙어서 은퇴를 하면 이곳에 마지막 둥지를 틀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그러나 인생살이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가 꿈꾸는 바램과 현실은 늘 동떨어지게 마련이고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점점 그 꿈은 멀어져만 가게 된다. 어느날 소스라쳐 깨어보면 이미 삶은 너무 많이 와버려 돌아 가기엔,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너무 늦어서 인생이란 강물을 되짚어 올라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딸애의 결혼식도 카멜에서 치러졌다. 데니를 낳고 그애가 한살이 되던 무렵, 늦게 미뤄 두었던 결혼식을 치루게 되었다. 나는 <정원처럼>이란 시를 지어서 한국어로 낭독을 했고 딸애의 큰딸인 사만타가 영어로 또 낭독을 했다. 결혼 생활을 하나의 삶에 비유해서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의 의미를 시는 담고 있었다. 딸애도 초혼에 실패한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잘 살아 가기를 나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로라는 병원에 있어서 사랑하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치 못했다. 결혼식 이틀 뒤에 로라는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살아 있을때 우리들은 크루즈며 여러 곳의 여행을 함께 다녔다. 카멜에 와서 며칠씩 같이 지내기도 했다. 그녀는 특별히 내가 만든 볶음밥과 군만두를 좋아했다. 그녀는 음성이 부드럽고 행동이 우아한 여자였다.
이제 로라도 가버리고 카멜 집도 추억 속에나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심고 가꾸었던 장미 꽃들과 과일 나무들, 그 숲속을 잽싸게 돌아 다니며 아이들이 던져준 과일 조각과 야채들을 물고 달아나던 작은 토끼들은 아직 그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특정한 장소는 어느 특정한 사람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카멜은 로라를 기억하고 우리 가족들의 행복했던 순간들도 그곳에 저장되어 있다. 며칠전 딸애가 빛바랜 사진 한장을 꺼내 왔다. 로라의 젊을때의 사진이었다. 긴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 뜨린 날씬한 여자가 행복하게 웃고 있다. 그녀의 남편 빌도 그 옆에서 웃고 있다. 아마 이 사진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정점을 이루었던 황금기에 찍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사람들이다. 다만 한때는 모든 것을 다 가진것 처럼 보였지만 모두 다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고 우리들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빛 바랜 사진 한장을 남겨놓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카멜 밸리는 그곳에 영원히 남아서 또 다른 사람들의 추억을 만들어 갈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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