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망들자 철든다’는 속담처럼 아버지 달이 지난 달로 지나갔건만, 어쩐지 희극배우 김희갑씨가 구성지게 부르던 그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유행가가 내 귓전에서 맴돈다. 그리고 내 가슴을 후비는 청각적인 슬픈 배음에 겹쳐, 지난날의 아버지 모습이 내 시각의 무대 위에 펼쳐진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세월이 흐른 그 날 저녁, 생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분들의 며느리인 지금의 내 아내에게서 태어난, 2살배기 손녀인 하나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하나의 동생 세현이, 이렇게 3대에 걸친 우리가족이 한국영화 ‘황성옛터’ 를 구경하기 위해, 내 고향 땅 통영극장을 향해 저물어 가는 바닷가 선창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등에는 하나가 업혀 가고 있었다. 그래도 통영 바닥에서는 유지 중의 한사람으로 손꼽혔던 아버지의 등에 말이다.
그 날 밤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영화를 보시면서 아버지는 연신 훌쩍훌쩍 울고 계셨다. 그 날 밤도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그 밤 아버지께서 우신 그 까닭이 그 영화가 슬픈 영화였기 때문만이 아닌, 또 다른 의미가 그 눈물 속에 고여 흐르고 있었을 것으로 내 나름대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눈물의 의미란, 애비가 가라는 의사의 길이 아닌 딴따라(연극)의 길을 걸어갔을 뿐 아니라, 연말에 세금내기 위해 창고에 쌓아 두었던 멸치를 애비 몰래 내다 팔아 연극 빚 갚고는 27살 나이에 서울로 도망가다시피 그의 곁을 떠난 자식 놈이 30나이가 다 되도록 장가를 밀어 오다가 그나마도 맞이한 며느리가 그분의 마음에 흡족한 모습으로 비쳤고, 그 며느리가 앵두 같이 예쁜 손녀 손자를 낳아 그 분의 품에 안겨 주었을 때, 그 분이 느낀 천륜의 정이 빚어 낸 눈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분들 곁에서의 5일간의 머무름을 마치고 서울을 향해 통영 항구를 떠나갔다. 우리를 실은 객선이 부둣가 선창을 떠나 올 때, 아버지께서는 끝내 돌아 서서 울고 계셨다. 그리고 우리를 태운 객선이 방파제를 돌아서, 사라져 나올 때 까지 아버지께서는 선창가에 그대로 서 계시던 모습이 지금껏 선하다.
우리가 서울로 돌아 온지 두 달 뒤, 아버지께서 소천 하셨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떠나오던 그 날 그 선창에서 우시는 아버지의 눈물의 의미는 그 분이 그의 죽음을 예감한 데서 오는 눈물이었을지 모른다. 그 때가 지금 같이 고령화 사회가 아닌 시절이었을망정 56살의 나이만큼만 살다 가신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장남이었던 나에게 많은 부분의 책임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그 분이 원하시던 대로 의사로써의 자리를 잡았더라면, 동생 셋의 대학 등록금의 멍에를 지고, 가파른 길을 하루하루 고되게 걸어가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분이 일찍 돌아가신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그건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아니,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살아 온 성격 때문인 것이다. 지방이기는 하지만, 고급관리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 청렴했다는 평을 받았다는 그 사실이 바로, 장남인 나를 빼고는 자식들의 대학 등록비와 서울에서의 하숙비까지 걱정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61년 10월5일 돌아가시던 그날, 통영의 발전을 위한 어떤 모임에 참석한 자리에서 한 안건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적당하게 넘어 가자는 어떤 분의 의견에 대해 원칙대로 하자는 아버지의 의견이 충돌함으로서 끝내는 물리적 충돌에 까지 이르러, 왜소한 체구의 아버지가 육체적으로 상처를 입는 수모를 당하시고는 집에 돌아 와, 독한 소주잔을 기울이며 분함을 삼키시다가 끝내 심장마비로 돌아 가셨던 것이다.
청렴이 지나쳐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사시다가, 쌓인 스트레스와 일제시대, 한 빈농의 15살 막내아들로 도방(도시)으로 건너가서, 농협 급사로 시작하여 28살 나이에 어업조합 이사까지 출세했건만, 자기의 자수성가 보다는 장남인 나에게 건 기대가, 사막에 신기루 같이 살아진데 대한 실망이 그 분을 일찍 돌아가시게 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버지가 바라시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어감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얻은 게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본다.
그 분이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59년, 나는 현대문학을 통한 추천완료와 국립극장이 모집한 장편희곡 모집에서,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 했었다. 그래서 그 해 5월, 내 추천완료 작품인 ‘흑백’ 이 실린 현대문학을 들고 고향 땅 통영으로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겉으로는 축하한다는 말을 하셨지만, 그 의 눈언저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고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건 그 분의 눈에 비친 예쁘고 참한 며느리와 미구에 그 며느리에게서 태어날, 손녀와 손자의 부양문제 걱정에서 오는 염려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성인극작가에서 아동극작가와 그 길의 운영가로써의 길로 방향을 바꾸어 내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 이 바탕의 개척자란 공인 된 칭호를 얻었지만, 그 텃밭을 가꾸다 말고 생각 없이 이민을 와 버린 이 마당에,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가며 이 길로 걸어온 결과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 해 본다. 그러면서 오늘도 나는 그 땅에 묻힌 아버지의 무덤과 그 분이 흘리시던 그 눈물의 뜻을 생각하면서, 불효자는 웁니다 보다, 더 슬픈 청개구리의 울음을 울고 있는 것이다.
(아동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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