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하는 영혼을 지녔던 휴머니스트 도스토예프스키가 ‘그것은 당신이 젊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아름다운 밤이었다’고 찬미한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백야는 새벽 3시에 공항에 내린 나를 다소 졸린 듯한 희끄무레한 빛으로 맞아주었다. 백야는 체류 내내 호텔방 커튼 틈새를 뚫고 나의 잠을 시샘했다.
지난달 하순 영화제 참석차 이 고도를 찾은 독일인 친구 엘마와 나는 도스토예프스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백야를 축배 들기 위해 호텔 5층에 있는 라스콜리니코프 바에 앉았다. 무뚝뚝한(러시안들은 대체적으로 퉁명스럽고 무뚝뚝하다) 여자 바텐더가 따라주는 보드카와 맥주를 마시면서 창밖을 내다보니 양파머리를 한 그리스 정교회가 백야 속에 숙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 호텔에 라스콜리니코프 바라니 이번 여행은 ‘프롬 러시아 위드 도스토예프스키’가 되겠구나 하고 혼자 속으로 웃었다. 호텔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까지 말년을 보낸 아파트와 지척지간. 호텔 인근의 앉은 자세의 도스토예프스키의 동상(사진)을 쳐다보니 돌 속 얼굴에서 평생 인간조건과 사회문제를 천착하던 그의 영혼의 노고가 짙은 윤곽을 그리며 무거운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와 사정이 비슷했던 고교생 때 ‘죄와 벌’에 심취했었다. ‘초인은 도덕적 규범에서 제외될 수 있으며 그를 위해선 버러지 같은 인간은 죽여도 된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빗나간 이타주의에 전적으로 동감했었다. 이 소설과 함께 인간의 이중성과 믿음과 신의 존재를 심리 스릴러 식으로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당시 감수성이 예민했던 10대의 내게 큰 영향을 주었었다.
엘마와 나는 ‘백야’의 주인공인 몽상가 청년이 백야를 걷다 대답 없는 사랑에 우는 아름다운 여인 나스텐카(나스텐카뿐 아니라 실제로 러시안 여자들 정말로 예쁘다)를 만난 폰탄카 강둑을 비롯해 도스토예프스키가 ‘슬프고 낙담해 그림자처럼 정처 없이 걷던’ 큰 거리 네프스키 애비뉴와 주변 건물들이 삭아내려 곧 무너질 것 같은 골목과 뒷길과 옆길을 샅샅이 헤집고 다니면서 이 궁전과 물의 도시를 마음껏 섭취했다. 그런데 왜 도시 전체를 잘 알고 있다던 도스토예프스키가 피터스버그를 ‘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이요 계획적인 도시’라고 했을까.
피터스버그는 건물의 도시다. 폰탄카와 모이카 등 도시를 뱀처럼 관통하는 강과 운하(베니스를 닮았는데 관광객을 태운 보트들이 교통 혼잡을 이뤘다) 양쪽에 즐비하니 늘어선 거대한 귀족들의 저택들이 도시를 묵직한 부식성 고전미로 감싸 안고 있다.
캐더린 여대제 등 차르들이 살던 겨울궁전 겸 300백만점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에르미타지 뮤지엄과 ‘뿌려진 피 위의 구세주’ 성당 및 도시의 건설자 피터 대제의 궁전(피터스버그서 보트로 30분 거리) 등이 관광필수 코스이나 여름철 관광객들로 도떼기시장을 이뤄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이보다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안 미술품들이 전시된 러시안뮤지엄 방문이 값졌다.
다리가 아프면 미터기도 없는 택시운전사와 손가락으로 요금을 흥정해 가며 다녔는데 구 소련시대 쓰던 구닥다리 차들이 꽤 보인다. 구소련의 잔재와 너도 나도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도시를 핵진처럼 덮고 있었는데 러시아 정부 청사에 아직도 버젓이 레닌 초상이 걸려 있다.
13세기 러시아의 구국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가 침공하는 튜턴족 군을 얼어붙은 강에서 궤멸시킨 도시를 남북으로 가르는 네바강을 건너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물이 힘차고 검다. 네바로 유입되는 모이카 강둑의 ‘이디옷’ 식당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제목의 식당은 그가 살던 시대 아파트 내부 식으로 꾸몄는데 보드카를 한 잔씩 공짜로 준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마린스키 극장 뒤에는 신관 건축이 한창. 극장 길 건너에 있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린카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돌아오기 전날 지난 1917년 레닌이 산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도스토예프스키 아파트를 찾아갔다. 리빙룸 아이들방 식당 및 서재 등이 모두 작다. 평생을 빚에 쪼들리며 산 그의 궁색이 느껴졌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집필한 테이블이 놓인 서재에는 마돈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종종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고 한다. 그는 인류는 자비와 사랑과 동정에 의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은 신앙인이었다.
한밤에 집필을 하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침대로 겸용한 소파가 있는 서재의 달력은 그가 사망한 1월 28일 1881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재에 붙은 리빙룸 테이블에는 후에 작가가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린 딸 류보프가 ‘파파 다이드(dyed) 투데이’라고 연필로 적은 담배갑이 놓여 있다. 아파트 어딘가에 이 위대한 작가의 혼이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 귀국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새벽4시에 탄 택시 창 밖으로 러시아의 백야가 어둠을 뿌옇게 밝히고 있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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