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떠나신 지 꼭 일 년이 지났다. 허다한 이별을 하며 살아왔지만 아버지를 잃은 슬픔은 오래 갔다. 싸라기 같은 별을 올려다보면 아버지 생각이 났다. 밥사발 같은 달을 보아도, 숯불 같은 노을을 보아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 뜨거운 설렁탕 한 그릇을 앞에 두고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리고 아버지를 기억해낸 가슴엔 여지없이 뜨거운 파장의 눈물이 지나갔다.
며칠 전, 동생들이 아버지를 찾아뵈러 갔다 오며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선산에 모신 아버지 무덤은 풀이 제법 푸르게 자라 곁에 계신 조부모님의 무덤처럼 편안한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선산 밑 비탈밭은 감자 대신 산딸기며 덩굴식물들이 장악해 버렸고 나뭇가지 넣어 휘휘 돌리면 바지게로 한 가득 솜사탕을 만들 것 같이 안개가 많던 저수지는 터무니없이 졸아들어 있었다.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는 그렇게 하나의 풍경에 섞여 들어가고 있었다.
동생은 허물어버린 옛 집터의 사진 몇 장도 첨부하여 보내왔다. 집은 없어지고 개망초만 무성한 텅 빈 집터에는 구부정하게 늙은 감나무 몇 그루만이 그 땅이 옛 집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외롭게 서 있었다. 안방의 구들이 있던 자리도, 몰려다니던 바람이 잠잠해지던 마당귀가 있던 자리도 흔적이 없었다. 모스러진 돌절구가 놓여 있던 헛간 자리도 나무 구새가 놓여 있던 외양간도 자취가 없었다.
혼인하시면서 집을 손수 지으신 할아버지는 집을 짓고 난 다음 가장 먼저 하신 일이 감나무를 심는 일이셨다. 고욤나무 밑동을 잘라 두 쪽으로 가른 다음 동네에서 가장 큰 대봉시 가지를 얻어다 그 사이에 끼워 접붙이기로 키운 감나무들을 집 둘레에 심으셨다. 집으로 들어서는 마당가에도 심으시고 뒤안 장독대 곁과 채마밭 가장자리, 또 사랑채 가까이와 외양간 곁까지 볕이 잘 드는 곳을 따라 다니며 감나무를 심으셨다. 감나무들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 있으며 똑같이 잎을 내고 꽃을 떨어트리고 감을 맺으며 집과 어울려 풍경을 이루어갔다. 그때의 감나무들은 어린 보폭을 바쁘게 움직여야지만 닿을 수 있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사진 속 감나무들은 아주 가까이 서 있었다.
집 둘레의 감나무 중에서 식구들과 가장 친밀했던 건 뒤꼍 장독대 곁의 감나무였다. 나무는 장독대에 그늘을 드리울까봐 가지를 쳐내서 조금 삐뚜름하게 서 있었다. 어떤 가지는 대숲 사이로 뻗어나가고 어떤 가지는 안채 지붕 위로도 가지를 뻗어 가을이면 초가지붕 위에 빨간 감이 올라앉아 있기도 했다.
초여름이면 잎겨드랑이에 조그만 꽃병같이 생긴 감꽃을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달고 있던 감나무는 식구같이 정다운 존재였다. 톳톳, 소리를 내며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감꽃의 어여쁨을 어떤 꽃의 몸짓으로 비교하랴. 장독대 뚜껑에 고인 빗물로도 떨어져내려 팽그르르 맴을 돌던 미색의 감꽃은 고개 숙여 감꽃을 줍는 내 목을 간질이며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도톰한 넉 장 꽃잎의 끝을 살짝 말아올린 채 피어 있다가 더러는 감이 되고 또 감이 되지 못할 숱한 꽃들은 봄의 끝이 되면 그렇게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풋감에 색이 오르면서 가을이 찾아왔다. 뒤꼍을 환하게 밝혀줄 듯 주홍으로 물들던 감들을 올려다보며 내 키가 자랐고 동생들의 키가 자랐다. 글씨를 쓰기도 하고 가위질을 하며 가지고 놀던 두터운 감잎이 붉게 물들고 햇빛을 먹은 주홍 감들의 살이 투명해지면서 가을이 깊어갔다.
새 지붕을 엮어 올리면서 지붕 위의 감나무 가지를 잘라내도 이듬해가 되면 영락없이 또 그쪽으로 새 가지를 뻗던 감나무가 고아처럼 의지할 데 없이 사진 속에 홀로 서 있다. 그 감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달아주신 분이 할아버지였는지 아버지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감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흔들려 그네를 타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소나기가 내리면 두터운 감잎이 빗줄기를 대신 맞아주느라 타닥거리던 소리와 그 잎사귀에 가을이 오면 마른 감잎들이 얼굴을 부비는 소리는 이제와 생각하니 한 소절의 음악과 같았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 것처럼 사진 속의 감나무들은 내 어릴 적보다 오히려 키가 작아진 것 같다. 그네를 서로 타겠다고 등짝을 밀어대던 동생도 감나무에 대한 추억에 잠시 사로잡혔던 듯 클로즈업시켜 찍어 보낸 감나무에는 밤톨만한 푸른 감들이 맺혀 있다. 미색의 통꽃을 밀어낸 자리에는 엄지손톱만씩한 풋감들이 매달려 있다.
감나무에 그네를 매어주던 어른들은 세상을 떠났고 그 감나무 밑에서 자라던 우리들은 머리칼 희끗한 어른들이 되었다. 동그랗게 오그린 초가에 갇혀 온기 나누며 살던 가족들은 낱낱이 헤어져 각자의 길로 간 지 오래이고 가족의 서사를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늙은 감나무들만이 사진 속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푸른 감톨을 맺은 채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사립이 있던 쪽을 향해 일제히 잎사귀를 내밀고 있다.
나무는 집도 사람도 없어진 그곳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머지않아 가을이 오면 혼자서 저절로 익어 터질 감들은 불을 밝힌 듯 빈 집터를 지키다가 아마도 까치밥이 될 것이다. 선산으로 가는 길에 삐뚜름하게 서 있던 고욤나무처럼 인기척을 기다리다 졸아든 속내를 감춘 채 홍시들은 서리를 맞고도 한참이나 거기, 붉게 매달려 있을 것이다.
시골뜨기로 자란 나는 감나무에 대해 쓴 두 편의 시를 좋아한다. 하나는 이재무 시인의‘감나무’라는 시이고 또 하나는 문태준 시인의‘그늘의 발달’이라는 시이다. 시 속의 감나무들은 제각기 외롭다. 감이 익기를 기다리며 목이 빠지게 감나무 끝을 바라보던 아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감나무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감나무(이재무)-
내일 그 ‘감나무’를 쓴 이재무 시인이 워싱턴에 온다. 그의 시가 친근하게 여겨지는 건 나와 같은 고향을 둔 시인, 그러니까 이웃동네에서 감나무 두어 그루쯤을 심어 놓고 함께 자랐을 동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시가 빛나는 이유는 견뎌낸 자들만이 얻어낼 수 있는 단단한 시어들이 거기 박혀 있기 때문이리라. 또한 자잘한 수식이 없어도 마음을 산란하게 흔들어 놓는 힘은 그의 정신이 누구보다도 실팍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라면 끓이려고 올려놓은 물에서도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듣는, 천상 시골뜨기 시인인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오랜만의 외출을 준비해야겠다. 시인을 만나거들랑 고향에 지천이었던 감나무의 안부나 한번 물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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