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전쟁 직전인 1860년 현재로 미국의 총인구는 31,443,000명, 흑인의 총수는
남북전쟁의 근인(近因)은 노예제도의 존폐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도화선은 1860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였다. 선거를 앞두고 세론은 크게 네갈래로 갈라졌는데, 첫째로 공화당 또는 그 지지자들은 노예제도를 전폐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둘째로, 남부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노예제도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정반대의 주장이었다. 셋째로는, 북미의 민주당원과 추종자들은 노예문제는 각주에서 임의로 주(州)의 법으로 정하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넷째로, 당시 비교적 유력한 정당이었던 헌정당(The Constitutional Union Party)은 노예문제는 미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이니만치 모든 것은 타협을 통해서 결정을 하도록 하고 극단적인 행위는 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괄목할 만 한 현상은 단일당인 민주당이 남, 북 두당으로 분리가 되어 선거에 임하였다는 점이다. 북부의 민주당과 남부의 민주당의 의견이 일치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예비 선거를 거쳐서 본선에 출마한 각 정당대표는 4명 이었다. 공화당에서는 Abraham Lincoln (전 연방하원의원), 민주당(북부)에서는 Stephen Douglas (연방상원의원), 남부민주당에서는 John Breckinridge(현직 부통령), 헌정당에서는 John Bell (전 연방상원의원) 이라는 후보였다. 당시 미국은 33주였으며 33개주에서 나오는 선거인단 총수는 303명이었다. 즉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려면 이 303표의 반인 152표 또는 그 이상을 얻으면 되게 되어 있었다. 이 4명의 국민투표의 득표 현황을 보면 Lincoln은 1,865,908표, Breckinridge는 848,019표, Bell은 590,901표, Douglas는 1,380,202표이다. 국민투표에서는 Lincoln이 국민투표총합계인 4,685,561표의 39.8%, Douglas가 29.5%, Breckenridge가 18.1%, Bell이 12.6%를 얻었다. 인기도는 국민 투표의 결과를 보면 나타나는데, Lincoln은 1위이기는 하지만 투표수의 과반수를 채 못 받았다. 그래서 Lincoln은 명대통령이기는 하지만 국민투표의 과반수를 못 받은 대통령이라는 딱지를 언제나 달고 다녀야 했다.
미국 대통령은 국민투표의 결과로 선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주를 대표하는 선거인단의 투표수로 결정이 되게 되어 있다. 선거인단은 선거인단대로 임의로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주민투표의 결과에 따라서 투표를 하게 되어 있다. 즉, 각주는 주의 주민투표에서 표를 가장 많이 획득한 당에게 그 주(州)가 갖고 있는 선거인단표 전부를 그 당에게 주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주민투표는 주의 당색(黨色)을 결정짓는 투표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33개주에서 나오는 선거인단 표 총수는 303표였다. 선거인단 표는 과반수를 받지 못하면 당선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이때 Lincoln은 과반수가 넘는 180표를 받았으므로 무난히 대통령으로 선출이 되었다. 참고로,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수를 받는 입후보자가 없는 경우는 연방 하원에서 재선을 하게 되어 있는데, 각주에서 1표씩을 던지게 되어 있고, 정족수는 총 의원의 2/3이어야 한다. 이 선거에서도 역시 과반수를 얻어야 당선이 되게 되어 있다.
당시(1860) 국민투표는 11월 6일에 있었는데, 이 시점에서 Lincoln대통령의 당선은 확정이 되었고, 선거인단 투표는 1861년 2월 11일에 실시되게 되어 있었는데 예상대로 Lincoln이 무난히 당선이 되었다. 대통령 취임식은 다음 해인 1862년 3월 4일 있게 되어 있었는데, 남부 7개주는 Lincoln의 당선이 확정되자 취임식 한 달을 앞둔 2월 4일에 연방으로 부터 탈퇴하면서 ‘미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독립을 선언하였다.
당시의 미국 내 흑인 노예상황은 다음과 갖다. 1960년(남북전쟁 직전)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미국 총인구는 31,443,000명인데 흑인의 총수는 4,441,000명으로서 전인구의 14%를 차지하고 있었다. 흑인 총수인 4,441,000명 중에는 자유흑인(노예가 아닌 흑인-Free Blacks)이 488,070명 포함되어 있다. 노예인구의 90%이상이 연방에서 탈퇴한 11개주에서 보유하고 있었다. (7개주는 남북전쟁 전에 탈퇴, 4개주는 전쟁 후에 탈퇴).
비노예흑인(자유 흑인)을 제외한 흑인노예 3,950,000명을 394,000명의 백인(전부 남부)이 소유하고 있었다. 1인당 약 10명꼴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중 노예소유주 약 4,000명은 각기 200명 또는 그 이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노예소유주 중에서 노예를 제일 많이 갖고 있던 사람은 South Carolina주 Georgetown에 살던 Joshua John Ward라는 사람인대 그 집에서는 전쟁직전에 1,130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목화 재배도 하였지만 주로 벼농사에 노예를 많이 썼다고 한다.
이상의 통계에서 잘 나타나지만 남부의 농장주들은 400만이라는 노예인력이 없으면 그 광대한 농장을 꾸려 나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농장은 한국의 농장과 달라서 농장하나가 한 마을의 크기를 넘어설 정도로 넓었기 때문에 상응한 인력의 뒷받침이 없으면 운영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Lincoln이 부르짖던 노예해방이란 노예를 무조건 석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노예라는 제도를 없앰으로서 그들을 인격권(人格權)을 갖는 자유인으로 돌아가게 하고, 떳떳한 근로자로 일을 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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