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의 80회 생신을 맞이하여 한국을 방문했다. 조촐한 가족모임 후에 우리 부부는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제주도로 떠났다. 이번 여행은 수박 겉핥기식보다는 느릿느릿하게 여유를 갖고 제주의 속살을 꼼꼼히 둘러보는 여행이 되기를 모두 원하였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길가에는 소철나무, 야자수들이 수국, 철쭉꽃들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유명한 관광지에서는 자원 봉사자들의 친절함과 해박함에 놀랐다. 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만장굴’에 대한 해설은 친절하고도 유익했었다. 용암이 흐르면서 바깥 쪽 용암은 굳고 속에 있는 뜨거운 용암은 계속 흘러나와 생긴 용암동굴인 ‘만장굴’ 안의 각종 무늬는 신비한 지하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요즘 제주에서는 올레길 체험이 한창이다. ‘올레’란 자기 집 마당에서 마을의 거리로 들고 나는 진입로를 뜻하는 제주어이다.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으로 쌓은, 집으로 가는 골목 올레는 집과 마을을, 나와 세상을 이어준다는 뜻을 담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제주 올레 길은 기자로 은퇴한 서명숙씨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에 지친 그는 스페인의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고 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걸었던, 프랑스 국경에서 시작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북부 산티아고까지 이어지는 800km의 길이다. 그 ‘인생의 순례길’을 걸으며 서씨는 웃음을 찾았고, 고향 제주에 평화와 치유의 길을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18개의 코스 중에서 우리들은 7번 올레길 코스를 걸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시간이었기에 바다도 보고 소나무 향기도 맡으며, 제주도의 조랑말 ‘간세’처럼 놀멍 쉬멍(놀면서 쉬면서) 꼬닥꼬닥(느릿느릿) 걸었다. 조랑말을 나타내는 표지판, 또는 나무에 달려 있는 파란색, 황색 리번이 우리를 반갑게 안내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걸으며 지나간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눴다. 기쁨도, 슬픔과 서운함도 바닷가의 파도소리와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바닷가를 걷다보니 큰 바위가 코발트 바다 위에 솟아 있고 큰 바위 앞에는 작은 바위가 정답게 누워 있는 곳이 나온다. ‘외돌개’라는 바위란다. 서있는 바위는 바다에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할머니 바위이고, 누워 있는 돌은 죽어서 할머니 앞으로 떠오른 할아버지라고 했다. 죽어서도 함께 한 두 분의 사랑이 너무나 애틋해서인지 할머니 돌의 눈가에는 물기가 있는 듯 하였다.
더 앞으로 나아가니 절벽을 따라 용암이 굳어져 생긴 육각형 기둥들이 무너진 돌 위를 걷는 길이 나온다. 온통 무너진 돌과 기둥들이니 확실히 보이는 길이 없고, 시간은 늦어져 해는 뉘엿뉘엿 서쪽으로 기울어진다. “길을 맞게 가고 있는 건가?” 하는 걱정이 생길 때마다 나타나는 작은 파란색 화살표가 무척이나 반가웠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도움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깨달았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외롭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화살표가 되어 주리라.”
한참동안 돌길을 가다보니 우리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밑에만 집중하여 걷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석양의 하늘, 주위에 있는 검은 바위와 부서지는 하얀 파도, 절벽에 찰싹 붙어 있는 어린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자연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우리는 무엇을 향해 가느라 바닥만 보고 조급하게 걸어왔던가?
얼굴을 간질이는 바람을 스치며 우리는 인생길처럼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걸어 아늑한 포구가 있는 마을에 다다랐다. 어느 집 돌담 너머로 가족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저녁을 먹는 모습이 행복하게 다가왔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한 중국 작가 ‘노신’의 글귀가 떠올랐다.
수평선으로 해가 아스라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일은 또 다른 희망의 태양이 떠오르리라.
김홍식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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