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에 노예가 아프리카로부터 처음 연행된 해는 1619년, 독립이전의 일
이조시대에도 노비제도는 계속이 되다가 고종23년(1886년)에 노비의 세습을 금하였으며, 갑오개혁(1894.6.)때 공사(公私)노비를 전부 없애고 인신매매를 금지하게 되어 일단 노비는 모두 해방이 된 셈이다. 이상과 같이 한국에서도 노예제도는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지만 이조말기의 현대화 풍조로 그 제도 자체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노비제도는 한국뿐만이 아니고 동양 삼국이 모두 갖고 있던 제도인데 중국의 수나라(隋 581~618)와 당나라(唐(618~906)때 조정에서 사회계층제도를 설정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일본에는 오색천(五色賤)이라고 해서 천민을 5등급으로 나누고 그 제일 하층을 노비라고 하였다. 노비제도는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명치유신후 4년째인 1871년에 해방령의 발효로 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제국에서도 노예제도를 갖고는 있었지만 자유를 표방하면서 건국을 한 미국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노예제도를 받아들였으며, 더욱이 세계에서 가장 노예를 많이 갖고 있던 나라가 되었고, 노예가 국력의 일부로서 필수불가결하게 될 때까지 묵인을 하였을까? 미국의 독립을 결정적인 것으로 이끌은 ‘토마스 페인’의 그 유명한 ‘카몬 센스’라는 소책자의 서두에는 “지금까지 자유는 지구의 어느 곳에서나 박해를 받았다. 오! 미국인이요 이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인도(人道)의 기점(基點)을 여기에 건설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문장이 실려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을 자유를 신봉하는 독립국가로 만드는데 박차를 가한 결정적인 문구라고 평을 받는 이 절규가 무색해 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유럽에 처음 연행을 한 나라는 포르투갈이다. 콜럼부스가 미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포르투갈서 인도(향신료의 보고)를 해로로 가려면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서 남단인 희망봉을 지나 동쪽으로 항해를 하면 된다고 가정을 하고 아프리카 서해안을 훑어내려 가면서 항로를 개척하는 한편 아프리카의 귀한 산물이었던 ‘후추’, ‘상아’, ‘금’, ‘고무’등을 무역상품으로 매매를 하였다. 그러던 중 1441년에는 흑인 12명을 노예로 본국으로 연행을 해 가게 되었다. 이후 아프리카의 흑인은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는 무역 상품으로 알려지게 되어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도 그 무역 국가로 가세가 되었다.
콜럼부스가 미대륙을 발견한 해는 1492년이지만 영국이 실제적으로 북미주에 진출하기 시작한 해는 지금의 ‘버지니아주’에 ‘버지니아회사’로 하여금 식민지를 건설하게 한 1607년 이며, ‘메이플라워호’가 청교도들을 태우고 매사추세츠에 도착한 해는 1620년이다. 영국의 미주 식민활동은 이때부터 본격화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이미 중, 남미를 무력으로 공략을 하고 식민을 시작 하였다. ‘꽁키스타돌레스(conquistadores)’ 라는 말은 스페인어로서 ‘정복자’라는 뜻이다. 남미는 시초 두 꽁키스타돌레스에 의해서 식민지화가 되기 시작을 하였다.
지금의 멕시코 땅에서는 12세기경 원주민 Azteca족에 의해서 인디안 문명이 꽃을 피웠고 15세기에는 멕시코 중앙고원을 중심으로 아즈테카 제국을 일으켜 인근을 지배하였으며 6세기서 14세기경에는 멕시코 동부 유카탄(Yucatan)반도를 중심으로 Maya 문명이 꽃을 피웠는데 이 두 문화권은 스페인의 정복자인 ‘코르테즈(Cortes)’라는 장군에 의해서 점령이 되어 멸망을 하였다.
1519년의 일이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남미의 남부, 지금의 알젠틴, 볼리비아의 일부, 칠레, 페루를 합친 영역에서 번성하던 잉카(Inca)제국은 1531~1533에 삐자로(Pizarro)라는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서 정복이 되었다.
중남미를 수중에 넣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현지를 개발할 인력이 부족해서 문제였는데, 노예 활용에 착안을 하고 노예무역을 본격화 하였다. 그러면서 영국이나, 네덜란드, 프랑스 등에서도 가세를 하여 노예무역은 일거에 이익이 많이 나는 무역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노예선(奴隸船)은 삼각무역을 함으로써 허비 없는 운행을 하며 많은 이익을 남겼다. 유럽각국의 노예선은 유럽에서 럼주(rum), 직물, 담배, 고물이 된 총기(銃器) 등을 실고 아프리카의 서해안에 가서 노예와 교환을 하고, 그길로 중남미로 가서 노예를 팔아넘기고 거기서는 유럽에서는 품귀한 광물이나 설탕 등을 실어서 갔다.
북미주에서는 노예상인(奴隸商人)들이 일용품이라던가 술을 싣고 아프리카로 가서 노예와 교환, 미국 남부에 가서 목화(木花)나 설탕, 담배등과 교환해서 북쪽으로 싣고 가서 폭리를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 노예는 인도적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혹독한 대우를 받았으며 인간이라기보다는 상품으로 취급이 되었던 것이다. 그 참상은 감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을 정도 였다는 것이다.
항해 중에는 불결한 취급으로 목숨을 잃게 하는 경우도 많았고, 심한 고열과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노예도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인권을 부르짖고, 자유를 표방하는 미국에서 이러한 노예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은 상상키 어려운 것이며, 결국 이러한 비인도적인 처사가 후일 막대한 인명의 희생을 요구 받는 남북전쟁으로 까지 연장이 된 것이다.
미국에 노예가 맨 처음으로 실려 온 것은 1619년의 일인데, 화란(네덜란드)의 무역선이 20명의 노예를 버지니아 식민지(1607년에 설치된 최초의 영국의 미국 식민지)로 싣고 가서 식량과 교환한 때의 일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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