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생 때 배운 바에 따르면 일본을 상징하는 사쿠라는 원산지가 한국이다. 내가 어렸을 땐 봄이 되면 모처럼 주말에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복작대는 창경원에 가서 사쿠라 구경을 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밤엔 전등불을 켜놓고 상춘객들을 받아 야사쿠라라고 했다.
일본 영화 ‘마키오카 자매들’(The Makioka Sisters·1983·사진)의 네 자매도 봄이 되면 교토를 찾아 만개한 사쿠라를 구경하는 것이 연례행사다. 영화는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사쿠라가 활짝 핀 숲을 카메라가 롱샷으로 잡으면서 시작된다.
주니치 다니자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곤 이치가와(반전영화 ‘버마의 하프’ ‘평원의 불길’) 감독이 만든 ‘마키오카 자매들’(Criterion사가 14일 DVD로 출시)은 2차 대전 직전인 1938년 오사카에 사는 기울어가는 마키오카 가문의 네 자매를 주인공으로 한 가족 멜로물이다. 소설은 1950년에 아베 유타 감독에 의해 맨 먼저 영화화 됐다.
첫 장면에서 수줍은 기색의 화사한 사쿠라를 보여준 카메라는 이어 눈 시린 푸른 키모노 차림에 입술에 새빨간 루즈를 바른 네 자매 중 둘째인 사치코의 얼굴을 화면 가득히 클로스업 한다(영화에는 클로스업이 많다).
사치코를 비롯해 네 자매의 첫째인 추루코와 각기 셋째와 넷째인 유키코와 타에코 및 사치코의 남편 테이노수케는 연례 사쿠라 구경을 위해 교토에 온 것이다. 이들이 비가 개이면서 사쿠라 구경을 가기 전 숙소에서 나누는 대화는 유키코의 선을 보는 얘기. 추루코와 사치코는 시집을 갔는데 셋 중 가장 수줍음 많고 보수적이요 과묵한 유키코는 혼기를 놓쳐 언니들의 속이 탄다. 유키코는 영화 내내 여러 차례 여러 남자들과 선을 보지만 모두 퇴짜를 놓는다. 그런데 테이노수케는 순진한 유키코를 연모한다.
넷 중 가장 신식이요 반항적인 타에코는 ‘모던 걸’로 연애쟁이인데 집안 전통상 언니가 시집을 가기 전에는 결혼을 할 수가 없어 시집 갈 생각을 아예 포기한 상태다.
마키오카네는 한 때 조선업으로 크게 성공, 부와 호사를 누리던 집안으로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가문이 기울어가는 상태. 영화는 시대와 가치관과 가족의 전통과 사회상 등이 변화해 가고 있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구시대를 상징하는 네 자매가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또 대처하는가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고요하면서도 밀도 있고 심도 짙게 묘사하고 있다.
이들 네 자매는 몰락한 귀족사회를 상징하는데 그들의 현대화의 물결 앞에서 과거를 지키려는 안쓰러운 모습이 자매들의 내밀하고 세세한 일상사를 통해 거의 긴장감이 감돌만큼 무게 있게 그려졌다.
과거에 사는 자매들의 얘기이니 만큼 영화 전편에 애잔한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결코 품위와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자매들의 권위의식과 체면과 신분유지의 꼿꼿함이 가히 의연한데 이런 자매들의 양반의식은 타에코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항상 입고 있는 화려한 일본 전통의상 키모노에 의해 함축성 있게 상징된다.
어떻게 보면 영화는 키모노와 오사카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형형색색의 무늬와 색깔로 물든 키모노를 카메라는 틈나는 대로 관상하며 펼쳐 놓는데 이런 의상을 입은 자매들의 아름다운 얼굴과 자태를 찍은 카메라가 관능적이다.
이치가와는 모든 색깔을 세상을 창조하는 신의 조화처럼 찬란하게 사용하고 있다. 봄의 분홍 일색인 벚꽃들과 붉고 노란 가을 단풍 그리고 천지에 가득히 내리는 백설이 마치 살아 있는 풍경화처럼 아름답고 감각적이다. 영상미와 함께 화면 구도와 명암의 절묘한 대조도 훌륭한데 음악은 가급적 절제하면서 가끔 헨델의 ‘라르고’를 쓰고 있다.
영화 끝에 도쿄로 전근하는 남편 타추오(후에 ‘탐포포’ 등을 감독한 주조 이타미)를 따라 가기로 결정한 추루코의 독백이 우리들의 인생살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계절도 변하고 일들도 벌어지지만 결국 변하는 것은 없구나.”
한 가지 비현실적인 점이 있다면 전시 자매들의 삶을 전적으로 부유하고 사치하게 표현한 점으로 보면서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소설에서는 이들이 후에 궁색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한다.
행동보다 대사(말이 많다)와 영상으로 서술되는 매우 느린 속도의 작품인데다가 얘기가 정처 없이 오락가락하며 이어져 다소 가라 앉은 듯한 기운도 느껴지긴 하나 매우 우아하고 조락의 비감이 담긴 고운 영화다.
*11일(오전 11시)-클레어몬트5, 모니카4, 플레이하우스7, 타운센터5. *12일(오전 11시)-상동. *15일(오후 1시10분, 4시20분, 7시30분)-선셋5. (310-478-3836)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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