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지금 ‘세상의 종말’ 그 이후를 살고 있다. ‘2011년 5월21일은 심판의 날’이라던 ‘예언’은 무위로 끝나고, 이전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지만 ‘종말’은 수시로 왔다 가곤 한다. 지난 100년 동안 100번 정도의 ‘종말’이 있었다고 한다. 한인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종말’은 1992년 10월28일의 휴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한다던 다미 선교회 이장림 목사가 주장한 최후의 날이었다. 그날 세상에는 아무 일이 없었고 이 목사는 사기죄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이번 ‘종말’은 북가주에서 래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는 해롤드 캠핑이라는 목사의 주장이었다. 5월21일 세계 인구의 3% 정도 되는 의로운 기독교인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이후 5개월 동안 대지진 등 재앙이 계속되다가 10월21일 세상이 완전히 끝난다는 각본이었다. 그러니 메모리얼 데이 연휴 계획 같은 건 생각도 말라고 89세의 이 노인은 주장했었다.
막상 ‘종말의 날’에 아무런 징조도 보이지 않자 그는 ‘계산 착오’라며 ‘사실은 10월21일이 진짜 심판의 날’이라고 번복했다. 비슷한 주장과 번복을 그는 1994년에도 했었다.
약과 독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같은 성분이라도 투여하는 양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종말’도 그 인식의 정도에 따라 우리 삶에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종말론’이 나올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추종자들이 적지 않았다. ‘종말’에 한 점 의혹이 없던 그들은 집을 팔고, 직장을 사직하고, 5월21일 이전에 전 재산을 다 쓰도록 재정계획을 세웠다. "내가 하늘로 올라가면 애완동물은 누가 돌보나"하는 걱정이 나오자 승천한 주인들의 애완동물을 대신 돌봐준다는 비즈니스까지 등장했다. 가입비 135달러의 이 프로그램에 등록한 자상한 주인들이 259명이나 되었다.
’종말’이라는 성분이 의식 속에 과도하게 주입된 케이스들이다.
그렇다고 ‘종말’ 인식이 항상 독은 아니다. 적당량의 인식은 삶에 의미를 더 해주는 약의 효과가 있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맹독성분, 보툴리누스균이 소량을 쓰면 얼굴의 주름을 펴주는 보톡스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얼마 전 20대의 여자 장례지도사가 본보 서울 판에 소개되었다. 시신을 염습하며 죽음의 길을 배웅하는 직업이 젊은 아가씨의 일로는 특이하기 때문이었다. 타인들의 종말을 매일의 현실로 살다 보니 그는 삶에 대한 인식이 남달랐다. "수백 억대의 부자라는 분이 돌아가셨는데 빈소엔 일해 주는 사람 말고는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더라"며 그래서 "내가 후회 없이 열심히 살고 있는 지 자주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필시 외롭게 숨을 거두었을 그 부자가 지난 삶에 대해 어떤 후회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후회가 많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 같은 책이 나오는 배경이다. 말기 환자를 돌보는 오츠 슈이치라는 일본인 호스피스 전문의는 회생 가능성 없는 환자들이 뒤늦게 털어놓는 후회들을 책으로 엮었다.
생의 마지막 고비에서 하는 후회의 내용은 특별한 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한 것, 진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고 산 것, 만나고 싶은 사람을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못 만난 것, 기억에 남는 연애를 못 해본 것, 꼭 한번 가보고 싶던 고향에 못 가본 것 등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걸, 건강을 소중히 여기고 담배를 좀 일찍 끊을 걸 하는 후회들도 있다.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평범한 일들이다. ‘종말’ 인식은 인생에서 ‘후회’의 뼈아픈 굴곡을 덜어준다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스티브 잡스 애플 최고경영자는 죽음에 관한 통찰력이 깊다. 그는 17살 때부터 죽음을 의식했다고 한다.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로 여기며 살라’는 경구에 감명을 받은 덕분이었다. "내가 조만간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서 중대한 선택을 할 때마다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고 그는 한 졸업연설에서 말했다.
오늘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무엇을 할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삶의 우선순위는 정해진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산다면 이 세상 떠나는 날, 후회가 덜할 것이다. ‘종말에 대한 생각’이 주는 선물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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