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이 어진 사람도 사노라면 ‘미운 놈’ 한둘쯤은 생기게 마련이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곧잘 ‘미운 놈’이 화젯거리로 등장한다. 때로 입에 거품을 물고 ‘미운 놈’ 성토를 해대면 듣기에 민망할 지경이다. 심한 경우 ‘미운 놈’이 나타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거나 그가 참석하는 자리에는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는 지인도 있다.
너무 설친다, 잘난 체 한다는 등 미워하는 사연이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좀체 융화가 안 되는 모양이다. 어지간히 아둔하지 않고서야 ‘미운 놈’인들 상대가 저를 미워하는 사실을 모를 턱이 없다. ‘미운 놈’도 상대를 똑 같이 ‘미운 놈’ 대접할 것임에 틀림없고 보면 이거야말로 악순환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확실한 방법이 바로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기’가 아닐까 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자주 듣고 자란 탓인지 사이가 나쁘다는 소리를 들으면 곧잘 이 속담이 떠오른다. 내 입에 넣기에 급급한 철없던 나이에는 ‘미운 놈’에게 먹던 떡을 한 입 베어 먹게 하는 것도 통 큰 결단이었다. 철이 좀 들면서 ‘떡 한 개 더’는 곧 관용과 포용이요, 미움이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하려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태도임을 깨달았다. “네 아버지 죽인 원수한테도 떡 한 개 더 줬지. 미워하면 버릇된다” 하시던 어머니에게는 분명 미운 사람이 없었다.
이 속담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통한다. ‘미운 놈’이 다 원수는 아닐지라도 원수가 ‘미운 놈’임에는 틀림없다. 한국인 제자가 예수께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라 하나이까?” 물었다면 예수께서는 주저 없이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줘라” 하셨을 것 같다.
일본은 한국의 미운 이웃이다. 과거 못할 짓을 크게 저지르고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도 또 용서를 하지도 않은 사이이니 아직도 관계가 껄끄럽다. 섬세하고 예민한 성정의 일본인들이 자신들이 한국의 ‘미운 이웃’임을 모를 까닭이 없다.
“발 벗고 나서 성금을 걷고 있는데 뒤통수를 쳐!” “참회할 줄 모르는 사악한 놈들은 당해도 싸지, 싸!” “돈 많은 일본을 왜 도와야 하는데?” “한일 과거사를 한번 제대로 들여다 봐. 그래도 순수하게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기나.”
최근 일본 지진 피해 돕기 모금운동이 한창인 가운데 일본서 불거져 나온 독도 영유권 문제로 미운 이웃을 도와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이유가 각종 매체를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모금액이 격감되었고 일본 성토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독도와 무관하게 시작된 모금운동의 초심을 그대로 성금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 반일(反日)과 극일(克日)을 넘어 일본을 이기는 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지진, 쓰나미, 방사능 누출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일본에 우승컵이 하나 안겨졌다. 같은 호모사피엔스인 온 인류의 이름으로 안겨준 ‘매너의 달인’ 우승컵이다. 자연 재해로 생사가 갈리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평정심을 잃지 않고 얼마나 인간답게 의연하게 처신할 수 있는가를 영상으로 전 세계에 생생하게 보여준 최초의 역사적 사례가 아닌가 한다.
일본이 재해를 통해 성숙한 매너를 보여주었듯이 과거 일본이 일으킨 식민 통치의 쓰나미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한국이 의연한 모습으로 가해국인 일본을 돕는다면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한국인의 성숙한 매너를 각인시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일본 도쿄의 전철역에서 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죽은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군을 10년이 지난 이 순간도 잊지 않고 추모하는 민족이 또한 일본인이다. 그의 추모 영화‘너를 잊지 않을 거야’ 시사회에 일본 천왕 부부가 참석했으며, 추모기념 ‘이수현 아시아 장학회’에는 1만여 명의 일본인이 지금까지 꼬박꼬박 성금을 보내오고 있다고 한다.
한 한국인의 희생을 계기로 일본인의 한국관이 바뀌고 한류 붐의 바탕이 됐다는 도쿄 신문의 기사는 분명 진실은 통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독도 생각만 하면 속이 뒤집혀도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는 우리 선조들의 넉넉한 마음으로 한국이 일본을 능가하는 성숙한 매너의 선진국으로 도약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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