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미 상륙 25 주년
올해는 현대차가 미 시장에 상륙한지 사반세기가 되는 해다. 1986년 소형 세단 ‘엑셀’을 앞세워 자동차 본고장 공략에 나섰던 현대차는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믿기 어려울 정도의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단순한 판매량의 증가 뿐 아니라 ‘그저 그런 차’에서 ‘가치 있는 차’로 거듭날 만큼 품질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미 진출 25년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① 미주 진출, 영광과 좌절
■역사적인 미 상륙
1986년 1월20일 현대 엑셀 1,050대가 울산항에서 ‘올리브에이스호’에 선적됐다. 미국 제1의 외국 자동차 수입항인 플로리다 잭슨빌로 향하기 위해서다. 해외시장에서는 아직도 걸음마 수준에 머물던 한국 자동차 업체가 마침내 세계 자동차 산업의 종주국이자 최대시장인 대미수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순간이다.
미국 항구에 도착한 현대 엑셀 차량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정확히 한 달 후인 1986년 2월20일 엑셀은 미국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19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했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1976년 ‘포니’로 한국산 자동차의 꿈을 실현한지 딱 10년 만에 그토록 그리던 꿈의 무대에 선 것이다.
엑셀은 현대가 초기 자동차 사업의 기반을 굳히고 세계시장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개발한 야심작이었다. 한국 자동차 역사상 전륜구동 형이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한 모델이다. 현대는 이를 위해 1979년부터 스타일링 작업에 돌입했으며 1981년 미쓰비시에서 새시 기술을 들여와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다.
엑셀은 1984년 1월 최초의 시제품이 개발되고 같은 해 캐나다의 혹한 테스트와 미국의 종합 성능테스트를 마치고 1985년 2월부터 양산에 돌입했다. 차 이름은 ‘뛰어난 포니’라는 뜻의 포니 엑셀로 정했다. 당시 정세영 사장은 “포니 엑셀은 우리의 정성과 기술이 집약된 수출지향형 한국 모델로 한국에서는 첫 전륜구동 방식을 채택한 첨단기술의 최신형 승용차”라고 감격스러워 했다.
■엑셀 신화를 만들다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 한국자동차 사상 첫 전륜구동형으로 개발된 엑셀을 살펴보고 있다.
미국 시장에서 ‘초짜 신인’ 현대의 데뷔는 누구보다 화려했다. ‘같은 값으로 신차 두 대를 살 수 있다’는 광고를 앞세운 현대의 광고에 업계는 ‘경악’했다. 당시 엑셀의 가격은 4,995달러.
내로라하던 세계적인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던 미 시장에 자체 기술과 고유 개발 모델을 앞세운 엑셀은 불과 4개월 만에 5만2,400대를 팔아치우며 1958년 프랑스 르노사가 세운 수출 개시 1년 동안 최다 판매기록을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첫 해 판매량은 16만8,822대. 수입차 부문에서 런칭 첫 해에 16만대 이상을 팔아치운 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전설’이다.
이듬해인 1987년에 엑셀은 26만3,000여대를 팔아 수입 소형세단 연간판매 1위를 기록했고 전체 소형 세단시장에서는 포드 에스코트에 이어 2위에 랭크됐다. 또 수입차 메이커별 판매순위에서도 4위에 뛰어오르며 승용차와 상용차를 합친 전체 차종 중 ‘베스트 셀링카 10’에 이름을 올렸다.
이에 대해 포천지는 엑셀이 역사상 가장 빠른 매출 신장률을 보인 수입품이라고 극찬했으며 뉴욕타임스도 미국에서 선풍을 일으킨 히트상품을 개발 또는 창안한 산업계의 숨은 영웅 6명 중 한 사람으로 정세영 당시 현대차 사장을 꼽기도 했다. 가히 미국에서 엑셀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메이드 인 코리아’에 감격하다
엑셀은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다.
고속 성장을 구가했지만 해외시장에서 무명이던 한국을 일약 자동차 수출국가 이미지로 각인시킨 것이다. 미주 한인들에게 현대차의 상륙은 100여년 전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첫 발을 내디딘 이래 가장 가슴 뭉클했던 일 중 하나로 기억됐다.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는 의류가 고작이던 미 시장에 ‘현대’ 로고가 선명한 엑셀의 모습은 마치 자동차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과 같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기업과 그 종업원만의 자랑이기보다 국민 모두 기뻐해야 할 경사’였던 것이다.
당시 현대 엑셀 미 시장 판매 총책임자였던 박성학씨는 1986년 2월20일자 미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엑셀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한국인의 긍지를 느낀다”며 “교포 한 분 한 분이 한국산 자동차의 홍보를 맡아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품질문제 영광은 뒤로 한 채
하지만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쾌속 질주하던 엑셀의 신화는 1989년부터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판매는 급증했지만, 품질에 이상신호가 나타난 데다 정비망도 따라가지 못했다. 신뢰성과 내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현대차는 소비자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저렴한 가격에 현대차를 장만했던 소비자들도 현대차를 외면했다.
쏘나타가 1989년 선보였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1990년에는 스쿠프, 1991년 엘란트라가 잇따라 출시됐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현대차의 북미 판매대수는 10만대 부근에 머물렀다.
1998년에는 9만대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무언가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그러나 북미시장의 상황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판매량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딜러들은 줄어들고 미주 법인도 적자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엑셀 신화는
‘악몽’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 현대차의 북미 마케팅의 새 역사는 쓰여지고 있었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차의 키를 잡은 1999년은 현대차의 터닝포인트였다.
1991년 본보에 실린 현대자동차 미주법인 특집기사.
<이해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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