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연락이 닿는 동기동창 모두에게 보낸 이메일이었다. 사적인 내용을 좀 가리고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 큰아들(1978년 12월 생) 장가 좀 가게 두루 알아보아다오. 명문 사립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아이비리그 대학도 우수 졸업하고, 직장생활 좀 하다가, 다시 법대 나와서, 워싱턴 D.C. 변호사 시험을 첫 번에(재수도 안하고) 합격한 후, 현재 D.C. 로펌에서 근무 중인데, 밤낮으로 일만 하느라고 사람(코리안) 만날 기회가 너무 없어서, 우리 부부가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
척 보아도 일등신랑감이다. 친구가 중고교 시절 전교에서 손꼽히는 미모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 아들의 외모 또한 준수할 것이 분명하다.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직업도 좋은 30대 초반의 청년이 배필을 못 구할 리는 없을 것이다. 딸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솔깃할 조건이다.
그런데도 친구가 초조해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노랑머리 가시내들이 채어 갈까봐" 이다. 집안의 자랑인 아들이 ‘혈통을 못 지키면 어쩌나’ 하는 이민 1세다운 걱정이다.
’노랑머리 파란 눈’으로 대표되는 타인종 사위·며느리는 1세들의 삶에서 마지막 장벽쯤 된다. 이민 와서 부부가 맞벌이하며 낯선 학교 시스템, 낯선 문화 속에서 자녀들을 반듯하게 키워내려면 삶 자체가 장애물 경주이다. 그 숱한 어려움을 뚫고 자녀를 명문대학에 진학시키면 1차 성공, 자녀가 좋은 직업을 잡고 나면 2차 성공으로 보통 간주된다.
그리고 나면 다가서는 것이 자녀혼사다. 조건 잘 갖춘 한인 사위·며느리를 맞으면 완벽하게 3박자 성공이 되는데 부모 입장에서 가장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이 관문이다.
단일민족 자부심이 강한 한인들에게 ‘혈통’은 포기하기 어려운 가치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상당히 상충되는 기대를 자녀들에게 걸곤 한다. 미국문화에 빨리 적응해 주류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 그러면서도 결혼만은 한인과 하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이다.
두 마음 사이에서 부모들은 별 모순을 못 느끼지만, 주류사회 속에서 사는 2세들에게는 양립이 쉽지 않다. 매일 얼굴 마주치며 교류하는 사람들 중 한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딸이 아이비리그 대학을 나와 주류사회 대기업에서 일하다 다시 대학원에 진학한 한 부부는 "한인사위 볼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고 한다. 딸이 전하는 주변 친구들 소식, 파티나 행사에 참석한 후 유튜브에 올린 사진 등을 유심히 살피지만 한인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좀 성급한 결론을 내리자면 부모로서 1차와 2차 관문에서 만점을 받으면 3차 관문에서는 성공 확률이 오히려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부모가 미국식으로 키운 자녀들은 정서적으로 미국사람에 가깝고, 한국식으로 키운 자녀들은 같이 어울리는 그룹이 한인인 경우가 많다.
한인2세들과 타인종의 결혼이 늘어나는 것은 피부로 감지되는 일이다. 친지의 청첩장에 인쇄된 외국이름이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그래서 신랑신부가 모두 한인인 결혼식에 가면 하객들은 두 배로 축하를 한다. ‘결혼해서 축하, 한인이어서 축하’이다.
뉴욕, 퀸즈 칼리지의 민병갑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해 발표한 논문 ‘아시안 자녀 결혼형태’에 따르면 한인2세가 한인과 결혼하는 비율은 절반이 못된다. 56.1%는 타인종과 43.9%만이 한인과 결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타인종 중에서는 백인이 가장 많았다. 1세 부모들은 이에 준해 기대치를 조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LA지사도 최근 타인종과의 결혼실태를 조사했다. 자녀가 타인종과 결혼한 1세 부모 8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며느리(32%)보다는 사위(58%)가 타인종인 케이스가 많았다.
타인종 며느리·사위로 인해 겪는 대표적 어려움은 언어장벽과 가치관·사고방식의 차이. 하지만 일단 가족으로 지내다 보면 한인 며느리·사위와 별 차이가 없다며 대부분(65%) 만족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전통적 사돈관계나 고부관계에서 자유로운 것은 가장 편한 점으로 꼽힌다.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는 한 ‘노랑머리 며느리, 파란 눈의 사위’의 잠재적 가능성은 높다. 타인종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하다 자녀가 마흔 되도록 미혼이라고 후회하는 부모들이 꽤 된다. 성인인 자녀가 택한 배우자감을 ‘인종’을 이유로 반대하기는 무리다. 대신 부모로서 여한이 없도록 한인 신랑·신붓감을 부지런히 알아보는 수고를 할 필요는 있겠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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