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우리 도시 박물관 특선 영화 프로그램을 통해 덴마크 영화감독 매즈 브루거(Mads Brugger)가 북한에서 만든 기록영화를 볼 수 있었다.
북한 기록영화라면 주민들의 삶을 찬양하거나 어려움을 폭로하는 기록영화들은 많이 보았지만, 외국인들이 북한을 방문해 공연하며 그 활동을 스스로 기록한 영화는 처음인데다, 2010년 썬댄스 세계시네마 기록영화부문 심사위원상 등을 받아서 무척 궁금했다. 상상을 초월했던 예고편 때문에 더욱 그랬다.
관람 전에,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하면서 주민들이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농사와 목장 관련 일을 보조해주는 미국의 비영리 단체 임원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저녁식사를 했다.
임원들은 당성이 확고하고 인물이 좋으며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평양주민의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평양주민들은 인터넷이 주어지고 CNN 뉴스 등 세계정보를 자유롭게 이용하며 비교적 물질적 여유가 있는 반면 지방주민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며 매일을 힘들게 지낸다는 그들의 리포트는 ‘철의 장막’이라는 것 외엔 북한을 잘 몰랐던 미국인 관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감독이 덴마크의 한국인 입양아 코미디언 청년 2명과 함께 평양에 도착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뚱뚱하며 잘 생기지 않은 사이먼과 신체장애, 언어장애로 다리를 절고 말이 어눌한 제이콥. 그들은 이 방문을 위해 ‘붉은 예배당’이란 극단을 만들어 북한정부의 억압과 인권유린을 비꼬는 풍자극을 마련해 놓고, 그 속 내용을 잘 모르는 북한정부로부터 2주간의 체류허락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들은 영어구사가 유창한 중년 통역인 미세스 박과 동행하며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첫 리허설을 보며 공포에 가까운 난감한 표정을 짓던 북한 극단장. 그는 매 리허설 때 마다, 제이콥이 무대에서 다리 저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휠체어에 앉히려 끈질기게 노력했다.
후엔. 아예 배우 제이콥은 정상인이지만 장애자 역을 맡은 것처럼 보이려 했다. 항상 미소로 말했지만 생사가 걸린 듯 집요하고 애절했다.
그들은 곳곳마다에서 완벽하게 생긴 사람들이 완벽하게 치르는 환영식을 받으며, 고맙지만 왠지 껄끄러운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공연자들과 개인적으로 어울릴 때도 마찬가지여서, 너무도 친절하지만 너무도 먼 거리를 느낀다. 특히 제이콥은 장애인에 대한 그들의 부자연스럽고 가식적 태도에 너무도 식상한 끝에 통곡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을 미워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너무도 친절한 그들에게 끌리는 정을 놓지도 못하는 같다.
매즈 브루거는 2004년에 이미 미국에서 공화당을 상대로 비슷한 기록영화를 찍은 적이 있다. 이번 영화를 통해서는 북한의 독재정권이 어떻게 인간의 정서와 상호교감을 왜곡하고 파괴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신체적으로 평양에 주거할 수 없는, 그것도 남한정부에서 버림받은(?) 한국인을 동행인으로 선택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비인간적이고 냉혈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북한체류기간 동안 독재의 거대한 공포를 서서히 느끼면서 스스로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간다.
제이콥은 어눌한 말투지만 항상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했다. 여정이 거의 끝나 제이콥이 마음 가득 불편함을 안고 북한군의 대대적 시가행진을 관람할 때였다. 관람인은 모두 손을 흔들어주었다. 물론 그들도 손을 흔들어야 했다.
그를 지극 대해주는 미세스 박의 간절한 권유에도, 브루거의 공포 섞인 어투의 명령에도, 제이콥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외국인들의 행동이 너무 눈에 뜨이는 까닭에 이들과 관련된 북한인들에겐 독재정부에서 살아나기 위한 궁여지책이 필요했던 걸까? 누군가 그들을 시가행렬 안으로 떠밀었다. 갑작스레 군인행진 대열 한 가운데 서게 된 그들. 이번엔 관람인들에게 손을 흔들어야 했다. 모두 손을 흔들어도, 휠체어에 떠밀려 앉은 제이콥은 끝까지 손을 흔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장애자여서 손을 흔들지 못했다는 변명을 했을지 모른다.
그 장면을 보며, 천안문 사건 때 탱크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던 청년이 생각났다. 제이콥은 전국행사인 행렬의 한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곳에서도 손을 흔들지 않음으로써 북한정부, 군인들, 미친 듯 손을 흔드는 관람객들, 그리고 브루거에게까지 소리 없이 외치는 것 같았다. "사람들아, 장애인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야!"
제이콥의 솔직하고도 용기 있는 감정표출은 이 영화의 빛나는 진주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영화제 상들을 받을 수 있었을까? 브루거의 공포 속 꼭두각시놀음이 두드러져 보였을 것은 확실하다.
김보경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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