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로 메주를 쑨다 해도 곧이곧대로 전했다. 단어 하나는커녕 받침 하나도 가감 없이 옮겼다. 한 번도 반항을 하거나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고맙다는 생각은 고사하고 그 존재마저 까맣게 잊는 때가 많았다. 오죽하면 ‘입 안의 혀’라는 비유가 생겨났을까?
그 혀가 말썽을 피워 한 달 남짓 곤혹을 치렀다. 3월 초, 그토록 충직한 나의 혀를 평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었던 양 오른쪽 가장자리를 두 어금니로 꽉 씹어 버렸다. 점심을 먹다 아차 하는 순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어찌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찔끔 흘러 나왔다.
씹힌 부위가 피가 맺혀 빨갛게 부어올랐다. 통증은 잦아들었으나 알사탕을 하나 물고 말하듯 말이 입 안에서 맴돌다 나왔다. 며칠 지나면 나으려니 했던 상처가 덧나기 시작했다. 말 할 때마다 닳아서 예리해진 어금니 모서리에 혀의 상처 부위를 비벼대니 상처가 아물 새가 없었다. 낫기는커녕 상처는 더 크게 부어올랐고 모난 돌이 정 맞듯 상처 부위가 기어코 한 번 더 씹히고 말았다. 강진에 겨우 살아남은 건물이 여진에 폭삭하듯 혀는 죽은 해삼처럼 축 쳐졌다.
말 한마디 하는 데도 적잖은 통증이 따랐다. 문제는 씹힌 혀에 적절한 치료법이 없다는 현실이었다. 자유분방한 혀를 붙들어 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창고를 붙이거나 연고 따위를 발라줄 수도 없는 딱한 형편이었다. 혀의 주인인 내가 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며칠 죽이나 먹어가며 혀를 푹 쉬게 하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내가 입 다물고 묵묵히 지내도록 허락지 않았다. 실험실이 비교적 혀를 적게 부려먹는 부서라고는 하나 업무상 대화는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제 혀 깨물고 병가를 얻기도 좀 멋쩍은 노릇이었다. ‘말 못할 사정’을 감추고 대화를 하고 나면 호전되던 상처가 다시 악화되었다. 시간이 약이거니 느긋하게 맘먹었다가는 병을 키워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을 판이었다. 혀를 살려낼 단호한 조치를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말수를 줄이기 시작했다. 대화를 할 경우 되도록 말을 간결하게 하고 듣기에 치중했다. 다행히 말을 적게 한다고 나에게 시비를 거는 상대는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사람들은 말을 듣기보다는 하는 쪽을 선호하므로 가끔 맞장구만 쳐주어도 훌륭한 대화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며 하는 대화는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게하고 오해와 말실수를 줄이는 이점이 있었다. 상대방은 나의 말 못할 사정도 모르고 묵묵히 들어주는 나의 태도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말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나와 입 안의 혀도 함께 평안을 누렸다.
회의는 가능한 짧은 시간에 마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했다. 중언부언, 사족, 잔소리 따위의 거품을 걷어내니 불투명한 사고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전화 통화시간도 대폭 줄이고 긴요하지 않은 통화는 되도록 자제했다. 하루 빨리 통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입 안에 혀를 두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참는다는 게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입 안의 알사탕이 녹아 사라진 듯 혀가 제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투병(?)을 하며 말에 얽힌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았다. 말을 배급제로 만들어 하루 백 마디의 말을 배급받아 쓴다고 해보자. 아마 거짓말, 잔소리, 욕, 루머, 가십, 중상모략, 언쟁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잡소리 하느라 못한 감사와 칭찬의 말을 가슴에 안고 내일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말수를 아껴야 말 실수가 적은 법이다. 열 마디 하면 세 마디 실수를 하는 사람과 한 마디만 실수를 하는 사람이 있다. 비율로 따지면 전자가 후자보다 세배나 실수가 많다. 그런데 하루에 전자는 열 마디를 하고 후자는 말이 많아 백 마디를 한다면 결과는 엄청 달라진다. 후자는 하루 열 마디의 실수를 하는 셈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게 만드는 유능한 혀에게 잡소리는 떠맡기지 말아야겠다. 제 혀를 씹지 않고서도 지혜로운 혀의 주인이 되는 자에게 복이 있을지니.
황시엽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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