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동북부의 중심도시이자 교육도시인 센다이(仙台), 그 도시 언저리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 삼대 명승지(名勝地)인 마쯔시마(松島), 그리고 우리 동포 다수가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시노 마끼(石卷)! 내가 들렸던 이들 마을과 섬의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풍경과 거기 사는 동포들의 따뜻한 온정(溫精)이 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내 가슴팍에 인상 깊게 그려진 그림처럼 남아 있건만, 지난달에 일어 난 강진(强震)이 마치 공상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용가리가 날카로운 발톱과 손톱으로 평화로운 도시를 할퀴고 갔듯, 그리고 뒤 이어 밀어 닥친 산더미 같은 해일(쓰나미)로 인해 이들 마을과 섬은 순식간에 폐허로 바뀌고 말았다.
내 나이 34살적인 1963년, 나는 내가 창단한 아동극단 ‘새들’의 제1차 일본공연을 위해 단원 25명, 지도교사 3명 그리고 학부모 대표 2명을 포함한 30명 단원을 이끌고 한일간 연락선인 한수환(韓水丸)을 타고, 부산을 출발하여 일본 시모노세키를 향해 현해탄을 건너가고 있었다.
한일간의 국교정상화(國交正常化)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우리 새들의 일본공연이, 우리나라 공연단체로는 최초의 해외공연이란 점에서, 크게 주목을 받은바 있었다. 그래서 도하(都下) 5대 신문에서 비중 있게 다루었던 사실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공연은 일본열도의 남쪽 끝자락인 시모노세키를 시발점으로 하여 히로시마, 히메지, 나고야, 교도, 오사카, 그리고 마지막 공연지가 바로 센다이였던 것이다.
일반극단도 아닌 어린이 극단으로 관광 스케줄을 포함하여, 장장(長長) 50일 간에 걸쳐 일본의 7개 도시를 순회 공연한 사실! 이는 우리나라 연극단체의 해외공연 기록에 생생하게 기록 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나이 즈음하여,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었던 그 때의 나의 남다른 패기(覇氣)에 대해 내 스스로 자부하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 새들 일행이 센다이 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에는 손에 태극기를 든 민단(民團) 간부들과 동포 어린이들이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새들 어린이 몇몇이 한 그룹이 되어 민박(Home Stay)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나는 동포 어린이들의 표정을 눈여겨 지켜보았다.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 그들 사이였지만, 단 며칠간의 함께 지냄이 그렇게도 기쁜지, 그들 동포 어린이들의 얼굴에는 함박꽃 같은 흐뭇한 웃음이 깔려있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그게 바로 그들 어린이 가슴 속에 잠재적으로 깔려있는 정체성(正体性),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것도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의 동포들 보다, 외진 곳에 사는 동포사회에서의 조국에 대한 동포들의 향수(鄕愁)가 더 찐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대목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의 센다이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고, 우리 단원은 센다이 근처의 어촌(漁村)인, 이시노 마끼 마을로 옮겨 갔다. 그 곳 동포들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었던 따사한 정을 나는 지금껏 잊지 않고 있다. 그 한 예로 우리 어린이 단원들이 센다이에서처럼 동포 가정에 머물었을 때, 더러워지지도 않은 옷을 정성껏 씻어 숯불을 피워 놓고 밤을 새워 말리던 늙은 할머니의 눈물겹도록 따사한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일본 동북부의 5일 간의 공연일정을 끝내고, 센다이 역을 떠나 올 때, 센다이 지역 어린이는 물론 이시노 마끼 지역의 어린들 까지도 하루의 결석을 마다 않고 센다이 역 까지 나와 우리 일행을 환송해 주었다. 그 때 그들 어린이와 우리 새들 단원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세계 역사상 네 번째로 큰 지진과 15m가 넘는 쓰나미로 이들 추억의 마을과 섬은 무참히도 망가지고 말았다. 그 때 마즈시마 관광에 나섰을 때, 그 때의 공연 작품인 ‘숲 속의 꽃신’에서 공주 역할을 맡았던 서울 용두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정정희에게 “정말 예쁜 섬들이지?” 라고 묻는 내 물음에, 정희가 “그래요, 파란 조개껍질을 엎어 놓은 것 같이 예뻐요!” 라고 감탄하던 말을 들으며 나는 일본의 유명 하이쿠 시인인 ‘바쇼’가 마쯔시마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그저 “아, 마쯔시마야, 아, 마쯔시마야!” 라고 뇌였다는 그 시구(詩句)가 떠오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마쯔시마의 동화 같은 모습을 이제는 추억의 세계에 담아 둘 수밖에 없으며, 센다이 역에서 우리를 맞아 주고 또 떠나보내 주었던 그 동포 어린이들이 지금은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의 나이에 접어들었을 게 분명하지만 이번 지진과 해일로 그 얼마만큼의 그들이 살아남아 있을 지 궁금할 뿐이다.
한편 세월은 흘렀지만 센다이 공연 때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가슴 샘에 금싸라기 같이 침전(沈澱)되어 있을 게 분명한, 그 때 그 공연에 참여했던 새들 단원 또한 이번 지진과 쓰나미 뉴스에 접하면서 이 주평 단장처럼 가슴 아파하고 그들이 이 큰 시련을 이겨 내어 봄 들판에 피어나는 냉이처럼 솟아나기를 바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아동극작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