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탄신 466 주년 기념 논고 ①
충무공께서는 1545년 4월 28일 서울 건천동(현재의 인현동)에서 태어나셨으니 올해로 466 주년이 되는 셈이며 이에 즈음하여 세종로 충무공 동상을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작년 말 12월 23일 세종로 충무공 동상은 한 달 남짓 보수휴가를 거쳐 속병과 묵은 때를 벗고 새로워진 모습으로 무사 귀환하였다.
이 동상은 원래 공의 탄신 423주년 바로 전날인 1968년 4월 2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열성으로 서울의 심장부 세종로 네거리의 높다란 좌대에 호국정신의 표상으로 처음 세워지면서 다양한 논란을 불러 일으켜 왔다.
이들을 열거하면 ▲ 칼집을 바른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은,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바른 손으로 칼을 뽑는 임전자세가 아니며 ▲ 들고 있는 칼이 등이 굽은 조선의 전통 환도가 아닌 일본도에 가깝고 ▲ 앞에 놓인 북이 세워져 있지 않고 눕혀 있어 독전의 긴박감이 아닌 휴전의 안일함을 연출하며 ▲ 걸친 갑옷이 중국형에 가까우며 지나치게 길어 어색하다는 것 등이다.
이들 논란을 보면서 필자가 참으로 어이없어 하는 이유는, 상품을 사들고 내용물은 살피지도 않은 채 포장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논란의 여지없이 충무공 동상은 인물상이며 따라서 표현의 주제는 충무공 이순신의 인물표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물표현은 간데없고 부속물만 가지고 변죽만 울리고 있는 모습이니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그나마 최근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국장 혜문 스님이란 분이 “동상의 얼굴이 영정과 닮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나섰음은 진일보한 관점으로 환영할 만한 일이나 영정 또한 고증에 충실했다고 보기 어려우니 어찌하랴.
세종로 동상제작을 맡았던 서울대 미술대 작고 김세중 교수 측에서는 미술품으로 보아 달라고 한다 하나 어불성설이다.
기념 인물상이지 미술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상이든 영정이든 발주명령자나 수주제작자나 한결같이 철저한 사실(史實)적 전문가 고증을 등한시 하는 풍조에 문제의 근본이 있는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는 없다. 그러면 이순신의 인물에 관한 어떠한 기록이 있는가?
이순신의 유년시절 골목친구이자 뒷날 임진왜란의 영의정으로 이순신을 역천 파격 승진시켜 전라좌수사라는 구국의 역정에 등단시켰을 뿐 아니라 임란 구국의 2대 명장인 권율까지 발탁한 지인지감(知人之感)의 명재상 유성룡은 전후 그의 저서 징비록(懲毖錄) 권 2에 이순신에 대하여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가 단아하고 힘이 서려(容貌雅筋)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라고 기록하여 이순신의 얼굴이 근골형이지 핸섬형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순신 용모의 보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묘사는 농가월령가의 저자로도 알려진 태촌집(泰村集)을 쓴 고상안의 기술이라고 본다.
고상안은 이순신보다 8살 아래이면서도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한 과거 동기생으로 경상도 삼가현감 재직 중 1594년 4월 한산도에서 통제사 이순신 주관으로 치러진 진중무과시험에 참시관으로 차출되어 15일 동안 함께 시험을 관리하면서 이순신과 수하 장수들을 관찰하고 인물평을 남긴 바 있는데 기술의 문맥으로 보아 관상술에 심취한 듯 구체적이고 자못 철학적 견해를 덧붙여 보다 정확한 인물묘사로 간주된다.
“통제사는 같은 해 출신이므로 한 곳에서 여러 날 같이 거처하였는데, 그의 언론과 술법과 지혜가 진실로 난을 제압할 재주가 있었고, 얼굴도 넉넉하지 않고 관상 또한 입술이 위로 말려(容不豊厚相又脣) 복스러운 장수는 아니다 하였더니 불행히도 국문을 당하는 운명도 맞이했고, 비록 다시 임용은 되었으나 겨우 기년을 지나서 또한 비환을 맞아 고종명을 못했으니 가탄할 일이로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도 군기를 바로잡고 죽음으로 통제하여 행장(小西行長)을 달아나게 하였으니, 국치가 조금이나마 설욕되고 공이 태상에 기록되고 이름이 만고에 흘러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를 보고 원균과 이억기의 무리와 어찌 동일하다 말하리오.”
얼굴도 넉넉하지 못하고 입술마저 위로 말려 올라가 역시 핸섬형은 아니었음을 적시하고 있다.
필자로서는 충무공 동상의 가장 큰 잘못은 장중한 몸집에 있다고 본다.
옛글과 같이 충무공은 평균 또는 그 이하의 마른 체형의 지장(智將)이지 동상과 같이 우람한 체형의 용장(勇將)이 아니기 때문이다.
맺음으로, 필자는 결코 오늘에 이르러 고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43년 동안 수많은 내외국인에게 서울의 인상으로 자리잡은 세종로 충무공 동상의 의미는 기념물의 경계를 넘어 문화재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대로 귀하게 보존하되 국민의 도리로서 실물과 사실 사이를 인식해 두고자 하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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