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미국으로 오기 전 3년 동안 신림3동에 살았다. 원래 명칭이 난곡이었다.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 야트막한 산의 거의 꼭대기까지 주홍빛 기와지붕의 아담한 경찰주택이 차곡차곡 있었다. 버스를 내려 정상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도 15분 이상 걸렸다. 그곳 맨 위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요즘처럼 사월이 되어 날이 풀리면 산 뒤편으로 넘어가곤 했다. 산 너머 따뜻해진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밭두렁을 지나 봉천시장에서 장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층 거실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남쪽과 서쪽편이 훤하게 보였다. 가까운 동네는 물론 멀리 구로공단, 영등포까지 보였다. 겨울날 아기주먹 만한 눈송이가 온 세상으로 펑펑 쏟아지는 풍경을 거실의 유리창으로 내려다 볼 때는 그 황홀한 장관에 홀려 어둑해 질 때까지 저녁밥 지을 생각도 잊고 쳐다보곤 했다. 날씨가 풀린 봄부터 가을까지는 관악산의 한줄기인 산등성을 따라 자주 산보를 했다.
토요일까지 일하던 시절이라 일요일 오전 내내 남편은 늦잠을 잤다. 방해가 될까봐 일찍 잠이 깬 아이들과 안방을 나왔다. 갓난이를 업고 서서 창밖으로 동네구경을 하였고, 연년생인 아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옆에서 놀았다. 일요일마다 이런 풍경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성경책을 안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교회를 향하는 모습이었다. 그 즈음은 전도를 해도 우리 가정과는 상관없는 그런 세계 같아서 귀담아 듣지 않았고 교회는 가본 적도 없었다.
어느날 교회로 향하는 이들의 모습이 문득 부럽게 느껴졌다. 일주일 중 엿새는 육신의 일을 하다가 주일 하루는 영혼을 살피는 그들이 어쩌면 맞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남편에게 “우리도 일주일 중 하루는 단정히 하고 교회로 한 번 가볼까?” 라고 물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이다. “모처럼 늦잠 속에 파묻히는 시간인데 교회로 가자고?” 펄쩍 뛴다.
이랬던 남편과 나는 미국에 오자마자 믿음이 생겼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일요일이면 교회로 향한다. 은은한 성가가 울려 퍼지는 예배실에 들어가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진다. 잠시 찬송의 멜로디에 젖어 내가 와야 될 곳에 왔구나하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예배시간에 세상의 근심걱정은 살며시 내려둔다.
예배가 끝나면 바로 점심식사 시간이다. 즐거운 먹는 시간이다. 아무런 사심이나 격식없이 느긋하게 좋은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먹고 마시는 시간이다. 신혼부터 지금까지 내가 먹을 음식은 직접 만들어야만 하는 팔자이다. 일터에서 일하고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와도 “오, 종일 수고했지. 어서 밥 먹어라” 하며 밥상을 차려 준 사람이 없었다. 수저만 들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런 형편은 학창시절 친정집을 떠난 후로는 끝이다.
주일날 교회에서의 점심은 만드는 수고 없이 그냥 숟가락만 들면 된다. 돈 한푼 지불하지 않아도 되고, 무제한 리필이 되고, 설거지조차 안 해도 된다. 참으로 여유로운 식탁이다. 그런 상황이 지극히 만족스러워 점심은 두 그릇 먹을 때도 있다. 우리 식탁의 후식담당을 자청한 교우가 매 주일 마다 산동네의 뒷마당에서 수확한 토마토, 자두, 감, 대추, 오렌지, 무화과 등 각종 제철 과일을 가져오신다. 겨울과 봄에는 과일 대신 맛동산, 찹쌀떡 등을 준비해서 내 놓는다.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아이들처럼 재잘대며 과자를 먹는다. 점심식사당번은 일년에 서너번만 하면 된다.
비즈니스도 잊고 지친 삶의 경쟁에서 잠시 벗어나 대화를 나누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이젠 일요일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들처럼 단정하게 차려입고 언덕을 내려가서 교회로 가고 싶었는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런 세계처럼 보였는데 이젠 내 인생의 가장 느긋하며 소중한 시간으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온 세상을 다 가진듯한 권력자도, 황금궁전에 사는 부자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다. 금권이 없을지라도, 온갖 역경이 덮칠지라도 사소한 순간을 행복으로 덧칠할 수 있는 사람, 소박한 즐거움을 기쁜 마음으로 누릴 줄 아는 사람, 염려는 내려놓고 매 순간 평강의 삶을 산 자가 가장 충만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될 것 같다.
그때 산꼭대기에서 바깥을 내다보면서 언젠가는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리라고 꿈 꾼 그 꿈을 이루며 살아온 것 같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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