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쓰여진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영국의 여류 샬롯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Jane Eyre)다. 무성영화에서부터 시작해 현재 상영 중인 미아 와시코브스카 주연의 영화까지 모두 19번이나 영상화했다. ‘제인 에어’는 영화뿐 아니라 TV 작품으로도 9번이나 만들어졌고 연극과 오페라와 발레로도 무대에 올려졌다.
고아 출신의 가정교사로 음울한 자신의 고용주 로체스터를 사랑하는 제인으로 나온 배우들은 조운 폰테인, 수잔나 요크 및 샬롯 갱스부르 등이 있다. 로체스터로는 오손 웰스, 조지 C. 스캇, 윌리엄 허트, 티머시 달턴 및 현재 상영 중인 영화의 마이클 화스벤더 등이 나왔다.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현재 상영작은 잘 만들긴 했으나 내가 보기엔 너무 차갑고 냉철하고 깔끔해 원작의 암흑적이요 질풍노도 같은 정열이 제대로 가슴에 와 닿질 않는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제인 에어’ 영화 중 가장 훌륭하고 또 팬들의 사랑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이 웰스와 폰테인이 나온 1943년 작 흑백판(사진)이다. 작가 알더스 헉슬리가 각본의 일부를 쓴 이 영화는 제인보다 로체스터에게 편중된 경향이 있긴 하지만 무드 있고 정열이 짙은 안개처럼 깔린 로맨스 명화다. 영화에는 얼마 전 작고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어렸을 때 고아원 원생으로 나오는데 나도 이 영화의 팬이다.
그러면 도대체 왜 ‘제인 에어’는 시공을 초월해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물음의 답을 ‘제인 에어’의 열렬한 팬인 여동생에게 구했다.
“제인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내적 힘이다. 제인은 생애 처음으로 알게 된 유일한 사랑의 원천으로부터 자신이 떨어져 나가게 될 줄 알면서도 자신의 도덕적 신념을 따르고 있다. 나는 그 힘이 제인의 사랑을 완전하고 정열적인 것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믿는다. 나는 제인의 힘과 독립심에 감복했고 그의 홀로 있음에 슬퍼했다. 제인은 여류작가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실제라면 로체스터는 제인을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이어 과거를 회상했다.
“옛날에는 모든 여고생들이 ‘제인 에어’를 읽고 그것을 사랑했던 것 같다. 책의 주요 매력은 그 것이 매우 로맨틱할 뿐 아니라 여주인공이 미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인은 하찮은 용모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들었다. 많은 소녀들은 매사에 자신이 없게 마련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여주인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제인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물론 멀리서부터 울려오는 로체스터의 음성처럼 로맨틱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책은 우리들의 단조로운 현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동생의 말 대로 ‘제인 에어’가 세대를 넘어 어필하는 까닭은 주인공의 인간적 딜레마가 우리 모두의 항상 보편적인 드라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인은 미와 매력의 여자라기보다 지성과 정열의 여자로 독립적이요 의지가 강하며 또 창조적이며 자기를 구속하는 것에 대항할 줄 아는 개성이 강한 여자다. 글이 쓰여진 빅토리아 시대를 훨씬 앞서 가는 여권 신장론자라고 해도 되겠다. 19세기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으로선 파격적인 존재다.
제인의 이런 성질의 많은 부분은 섬뜩하고 침울하며 또 거의 폭력적인 정열의
소유자인 로체스터도 소유하고 있다. 같은 성질의 천애 고독자들이 만났으니 둘 간에 숙명적인 사랑이 불타오를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정열적인 샬롯은 동시대 여류작가인 제인 오스틴의 글이 정열이 모자란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제인의 눈으로 얘기되는 소설 ‘제인 에어’는 로맨틱하면서 아울러 공포 분위기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신화적 요소를 지닌 동화라고도 하겠다. 로체스터의 저택 손필드는 귀신이 나올 것처럼 우중충한 분위기를 지녔는데다가 집안에서 이상한 일까지 일어나 으스스하다.
그리고 동생 말대로 제인이 로체스터를 버리고 손필드를 떠난 지 오랜 후 하늘을 타고 들려오는 “제인 제인”이라는 로체스터의 음성처럼 로맨틱한 것도 없겠는데 이 소리는 로체스터가 외친 실시간에 제인에게 들려온다. 이건 완전히 저 세상적인 현상으로 사랑의 초현실적인 힘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어둡고 격정적이며 숙명적인 내용의 ‘제인 에어’의 해피엔딩이 다소 마음에 안 든다(이와 반대로 샬롯의 동생 에밀리는 비극적인 애정의 복수 드라마 ‘폭풍의 언덕’을 썼다). 내가 이 얘기를 했더니 동생은 “(주인공이)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해피엔딩이 돼야지”라며 깔깔대고 웃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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