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보도된 AP사진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로부터 80km 떨어진 지역 도로를 공중에서 찍은 긴 사진이었다.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해안도시 한가운데를 왕복 2차선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었다.
사진 제목은 ‘꼬리 문 탈출 차량들’.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는 자동차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주차장이나 다름없고, 반대쪽 도로에는 말 그대로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우연으로라도 차 한 대쯤 반대방향으로 달릴 법한데 그 긴 사진의 한쪽 도로는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후쿠시마 원전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방사능 물질이 이 지역까지 퍼졌다고 알려지면서 모두가 멀리 멀리 피난길에 나섰다.
일본을 강타한 재앙의 끝은 어디일지 알 수가 없다. 진도 9.0의 대지진도, 높이 20m가 넘는 마의 쓰나미도 ‘자연이 하는 일’로 받아들이며 울음을 삭이던 일본인들도 더 이상은 냉정할 수없는 상황이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의 4개 원자로에서 연쇄적으로 폭발이 일어나고 불꽃과 연기가 무섭게 뿜어오르자 방사능 공포가 바짝 다가들었다. 전기가 끊겨 캄캄한 어둠도, 뼈를 파고드는 추위도, 밥 한공기로 하루를 버티는 배고픔도 참아낼 수 있지만 방사능은 이야기가 다르다. 참아서 될 문제가 아니다.
두려움은 히스테릭한 대피행렬을 만들어내고 있다. ‘재앙의 핵’으로 떠오른 후쿠시마 원전을 중심으로 일본정부는 반경 30km 내 주민들, 미국 등 외국정부들은 80km내 자국민들에게 대피를 지시했다. 후쿠시마로부터 멀어지려는 차량들이 도로를 메우고 일본열도를 벗어나려는 사람들로 공항이 북새통이다. 웃돈 주고도 비행기 표를 못 구하자 전세기를 동원해 자국민들을 ‘탈출’시키는 나라들도 있다. ‘후쿠시마 대탈출’이자 ‘일본 대탈출’이다.
그런데 그 아우성의 이면에 전혀 다른 소수가 있다. 깃발처럼 빛나는 특출한 소수이다. 모두가 목숨 걸고 빠져나오는 그곳, 방사능의 저주가 내린 그곳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더 끔찍한 재앙이 터지지 않도록 사투를 벌이는 180여명 원전 직원들이다. 독가스 실이나 다름없는 환경에 그들은 스스로를 내던졌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투철한 직업정신’만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경이로운 자기희생이다.
톨스토이는 우리 인생이 "동물적인 것에서 벗어나 신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관심이 자기 한 몸 먹고 사는 본능의 단계에 머물면 동물적 차원,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인류를 품어 안는 단계가 되면 신의 차원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저마다 동물과 신, 그 중간의 어느 단계로 살고 있을 텐데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재앙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밥 한줌을 두고 아귀다툼하는 동물적 차원의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남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버리는 지고한 차원의 사람들이 있다.
일본정부는 방사성물질 연간 노출 허용치를 250 밀리시버트로 잡고 있다. 미국의 기준 보다 5배나 높은 수치이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후쿠시마 제1원전 내 방사능 유출정도는 심할 때 시간당 400 밀리시버트에 달했다. 이런 수준의 방사능 피폭이라면 37분 이상 지체하지 말고 즉시 그 자리를 떠나서 1년 내에는 다시 돌아오지 말아야 안전하다고 한다.
상황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곳에 묶여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암으로 죽을 위험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원전직원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최악의 원전사고로 기록된 1986년 체르노빌 원전폭발 당시 근로자 600명 중 134명이 방사선 증후군에 걸리고 그중 28명이 서너달 안에 사망했다. 그때도 숭고한 희생이 없지 않았다. 냉각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측정할 방도가 없어 우왕좌왕할 때 한 엔지니어가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30분 만에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3피트 남았다"고 말했다. 긴급한 상황에 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방사능 물질 가득한 수조 안으로 직접 들어가 수위를 쟀다. 그리고는 곧 목숨을 잃었다. 순교였다.
후쿠시마 원전의 이름 없는 영웅들 중에도 필시 순교자는 생기고 말 것이다.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내어놓은 그들의 목숨 건 염원이 밑거름이 되어 재앙의 잔인한 기세가 수그러들기를 기도한다. 자기희생이야말로 모든 기적을 만들어내는 진짜 기적이라는 에머슨의 말을 기억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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