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질 것만 같은 거대한 젖가슴과 커브가 진 몸매 그리고 아마존과 같은 체구에 자기를 탐하는 남자들을 멸시하면서 동시에 유혹하는 듯한 눈매를 지녀 나처럼 작은 남자는 주눅을 들게 만드는 할리웃 황금기 최고의 육체파 제인 러셀이 지난달 28일 캘리포니아 샌타마리아 자택에서 숨졌다. 향년 89세.
러셀은 그의 풍만한 젖가슴을 영화 선전에 100% 이용한 데뷔작인 웨스턴 ‘무법자’(The Outlaw·1943)로 대뜸 할리웃의 섹스 심벌의 우상이 됐다. 서부의 무법자 빌리 더 키드의 삶을 그린 영화에서 러셀은 빌리의 애인 리오로 나오는데 그 때까지 연기경험이 전무한 러셀이 영화에 발탁된 것은 그의 거봉과 같은 젖가슴 때문이었다.
영화의 감독이자 제작자인 하워드 휴즈는 리오 역을 위해 가슴이 큰 미녀를 찾고 있었는데 휴즈의 캐스팅 에이전트가 LA 인근의 밴나이스 고교를 나온 뒤 당시 파트타임 모델로 일하던 러셀의 사진을 보고 그를 오디션에 초대, 단 한 번의 오디션 끝에 리오로 선정됐다.
그러나 휴즈는 러셀의 젖가슴 때문에 당시 영화 검열당국인 프로덕션 코드와 등급 판정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휴즈는 러셀의 젖가슴을 자기의 사명으로 삼고(손수 특별 브래지어 까지 만들어줬다) 그것을 가능한 한 자극적으로 노출시키기 위해 러셀이 입고 있는 셔츠가 찢어질 것처럼 튀어나온 젖가슴과 함께 젖무덤 사이를 훤히 드러나게 한 뒤 도전적인 자세로 짚더미에 기대어 앉은 포즈(사진)를 찍어 검열당국을 진노케 만들었다.
이런 내용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휴즈로 나온 ‘비행사’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결국 ‘무법자’는 등급 없이 개봉됐지만 러셀의 젖가슴을 둘러싼 공방전이 큰 선전이 돼 빅히트를 했다. 영화는 범작이지만 러셀의 젖가슴 하나만은 정말 볼만하다.
러셀을 할리웃 육체파의 여신으로 만들어준 바람둥이 휴즈는 유부녀인 러셀을 침대로 유인하려다가 퇴짜를 맞고 그 뒤로는 러셀을 깍듯이 숙녀로 대접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러셀은 자서전에서 휴즈를 매우 상냥하고 관대한 신사라고 평했다.
러셀은 산봉우리 같은 두 젖가슴 때문에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들이 가장 좋아하는 핀업 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군들은 1952년 강원도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두 산봉우리를 러셀의 가슴을 본 따 제인 러셀 고지라고 명명한 바 있다.
러셀은 그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코미디에는 능했다. 그 대표적 영화가 마릴린 먼로와 공연한 재미있고 화려한 뮤지컬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1953)이다. 먼로와 러셀은 친구 사이인 쇼걸로 나오는데 둘이 함께 몸을 비비 꼬아대면서 부르는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최고의 친구’는 유명한 노래다.
내가 러셀을 처음으로 본 것은 중학생 때 명동극장에서 본 웨스턴 풍자영화 ‘페일페이스’(1948-제목은 인디언이 백인을 보고 부르는 말)에서였다.
밥 호프가 겁쟁이 치과의사로 나온 영화에서 러셀은 서부의 전설적 총잡이 컬래미티 제인으로 나온다. 어릴 때 깔깔대고 웃으면서 본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웨스턴 중 하나로 역시 호프와 러셀이 나온 속편 ‘페일페이스의 아들’도 재미있다.
러셀은 로버트 미첨과 공연한 필름느와르 ‘마카오’와 클라크 게이블이 주연한 웨스턴 ‘톨 멘’에도 나왔지만 이 영화들을 비롯해 러셀의 전성기이던 1940~50년대의 대부분 영화들은 타작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보수파였던 러셀은 1970년을 끝으로 스크린을 떠나 그 뒤로는 나이트클럽 등 무대에서 쇼를 했다. 나는 지난 2006년 LA타임스에 난 러셀의 쇼 기사를 읽고 꼭 한번 구경하러 가겠다고 벼르다가 성사를 못한 것이 크게 후회가 된다. 러셀은 당시 84세의 나이에도 샌타마리아의 래디슨 호텔에서 자기를 기억하는 올드 팬들을 위해 매주 이틀씩 1940년대 식 쇼를 했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죽은 뒤에도 한국에 자기 이름을 남긴 러셀은 후에 자신이 풍성한 육체미로 세인의 관심을 끈 것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 “나는 틀에 박힌 대로 주는 역을 해야 하는 할리웃의 희생자였다”라고 술회했다. 러셀의 장례식은 12일 오전 11시 샌타마리아의 퍼시픽 크리스천 처치에서 거행된다.
지난 28일은 내가 좋아하던 프랑스 여우 아니 지라르도가 파리에서 79세로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생애 100여편의 영화에 나오면서 세자르상을 세 번이나 탄 지라르도를 내가 처음 대면한 영화는 대학생 시절 중앙극장에서 본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걸작 ‘로코와 그의 형제들’. 알랑 들롱이 나온 영화에서 본 지라르도의 피곤한 듯한 얼굴표정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두 여배우의 명복을 빈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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