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에서 공부하던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에 뉴욕에서 온 또 다른 한인 신입생을 알게 되었다. 나이는 필자보다 3살이나 어렸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친구 가족들이 모두 뉴욕에서 올라와 같이 저녁식사를 하는데 나를 초대하겠다는 것이었다. 형제들이 제법 많은 가족이었는데 필자 혼자만 객식구가 되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굳이 또 친구의 호의를 거절할 만한 핑계도 없었기에 초대에 응했다.
저녁식사는 중식 레스토랑에서였다. 그 때까지 필자가 먹어 보았던 중국음식이라고는 한국식 중국음식 밖에 없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필자가 아는 중국음식은 자장면, 짬뽕, 그리고 어쩌다 한 번 먹어볼 수 있었던 탕수육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친구 가족들과 식사를 하게 된 중식 레스토랑은 미국식 중국요리를 하는 곳이었고, 미국에 온지 그 당시 3년 밖에 안 된 필자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메뉴를 보았으나 당연히 이름을 아는 음식은 없었다. 그냥 친구 가족들이 주문하는 음식을 같이 먹기로 했다.
그런데 애피타이저로 나온 요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먹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빈대떡보다 더 얇게 반죽해 쪄서 나온 전병을 모두 하나씩 집어 자신들의 접시로 옮기는 것까지는 흉내를 냈는데,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될지 망막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 요리는 Mooshi Pork라는 것이었는데, 그 전병에 소스를 약간 바르고 야채와 돼지고기를 섞어서 만든 내용물을 얹어 쌈처럼 싸 먹는 요리였던 것이다. 처음 대하는 요리를 보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왠지 창피한 마음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먹는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냥 아무런 맛도 없는 전병만 손으로 조금씩 찢어먹었다.
한 번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대학교 때 필자는 학교 캠퍼스에서 차로 약 2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한인교회에 출석하였다. 차가 없었으므로 교회를 갈 때에는 대학원 선배님으로부터 라이드를 받아 가곤했다. 당시에 이 교회의 규모는 아주 작았다. 약 40~50명 정도가 예배를 드렸는데 성가대의 규모는 10명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필자도 성가대에 참여했는데 반주자를 겸했던 지휘자님께서 하루는 당신 집으로 식사초대를 하셨다.
일요일 예배 후 지휘자님 댁으로 가서 사모님께서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신 음식을 잘 먹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실 지휘자님 댁의 위치가 지도상에서 어디쯤에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지만, 집 앞에 바로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그 곳에서 버스를 타면 학교 캠퍼스 바로 앞에서 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작별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이미 날은 캄캄하게 늦은 밤이었는데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미처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못했던 필자는 우산도 없이 버스정류장 표시판 가까이 비를 좀 피할 수 있는 곳에 서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도통 버스가 오질 않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일요일 밤에는 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데, 평소 버스를 탈 이유가 없었던 지휘자님께서는 그 사실을 모르셨던 것이었다. 그렇게 한 두어 시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캄캄한 밤에 어두운 색깔의 양복을 입고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는 낯선 동양남자를 위해 선뜻 라이드를 주겠다고 멈추는 차는 없었다. 마냥 그렇게 서 있다가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천신만고 끝에 겨우 라이드를 얻어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왜 그때 바로 지휘자님 댁으로 돌아가 라이드를 부탁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한심스럽기까지 하다. 오랫동안 오지 않는 버스를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었던 내 자신의 어처구니없음이 부끄러워 그냥 그렇게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애들을 키우면서 필자의 애들에게도 이런 숫기 없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무모한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어떤 때는 그냥 창피해서 당연한 길을 외면하고 돌아가거나 그냥 그 자리에 서있는 경우를 본다. 이럴 때에 부모가 된 우리는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래도 자식들의 자존심이나 창피한 부분을 바로 직접 건드리지 않고 조언을 해주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한다. 위하는 마음에 해주는 말이 자칫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거나 마찰을 야기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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