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새벽 뒷골목에 /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 오직 한가닥 있어 /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서두>
아랍권에 들불처럼 번지는 민주화 혁명의 아우성이 두터운 망각의 지층을 뚫고 한반도의 목마름을 불러온다. 목마름의 기억이다.
중장년층 한인들에게 ‘혁명’은 낯설지 않다. 각자 연배에 따라 4.19 혁명을, 박정희 정권 최후의 날을, 달콤했던 그러나 불안했던 서울의 봄을, 이어진 광주 시민항쟁, 그리고 마침내 87년의 6월 항쟁을 젊은 날의 날카롭고 빛나는 기억으로 가슴에 품고 있다. 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압제 속에서 젊은 우리는 자유와 민주, 정의와 인권이라는 불온한 꿈을 꾸며 설레고 좌절했다.
그 꿈의 기억들이 2011년 오늘 공간적 거리를 뛰어넘게 한다. 먼 나라 먼 민족, 아랍민중의 민주화 열망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2011년은 아랍역사에, 그리고 세계사에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가. 북아프리카·중동에서 민중이 절대 권력에 저항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저항이 민주화라는 결실로 정착될 수 있을 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역사 속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만은 분명하다.
무기력한 존재들로 여겨졌던 민중이 분노하자 무서운 힘이 분출되고 있다. 처음 시민항쟁이 일어난 튀니지에서 4주 만에 벤 알리의 23년 독재체제가 무너지더니, 그로부터 채 한달이 못 돼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30년 체제가 붕괴되었다.
두 번의 승리로 힘을 얻은 민주화 항쟁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었다. 아랍 전역은 물론 멀리 중국으로까지 불길이 번지고 있다. 돈 많은 산유국들은 수천달러씩의 보너스로, 그렇지 않은 나라들은 정권이양 등 민주화 약속으로 성난 민심 달래기에 급급하다.
유독 리비아만은 예외다. 독재자 카다피는 용병을 사들이고 전투기까지 동원하며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국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42년 철권통치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 역사에는 거스를 수 없는 변혁의 시점이 있다. 그 때가 이른 것이다.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비등점이다. 화씨로는 212도가 된다. 화씨 211도까지 물은 뜨거울 뿐 물질의 상태는 바뀌지 않는다. 비등점인 212도가 되면 물은 표면과 내부에서 기포가 발생하면서 끓기 시작한다. 액체가 기체로 바뀌는 물질의 대변혁이다. 1도의 차이가 엄청난 변화를 불러온다. 아랍권에서 1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북아프리카·중동의 아랍세계는 정지된 사회였다. 수십년 장기집권이 보통인 사회에서 시간은 20세기의 어느 시점에 멈춰버렸다. 장기간의 독재정치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낳고 부패는 사회 양극화 현상으로 이어진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점점 더 많은 힘과 부를 누리고, 서민들은 빈곤층으로 전락해 가난과 억압 속에 버려지기 마련이다.
2002년 유엔 아랍 인간개발 보고서는 아랍권에 가장 결핍된 것으로 교육, 자유, 여성권익을 꼽았다. 국민 대다수가 교육 받지 못하고, 여성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며, 자유와 인권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피라밋의 찬란한 문명을 가진 이집트에서 문맹률이 30%이고, 국민의 40%가 하루 2달러로 생활하는 형편이다.
게다가 인구의 60% 이상이 30세 미만 연령층인 것도 불안요소이다. 한창 혈기 왕성한 그들 청년의 실업률이 25%나 되니 사회적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 화씨 211도에 치달았다.
그때 마지막 1도를 끌어올린 것이 튀니지 청년 분신사건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 노점상을 하던 청년이 여자 경찰관으로부터 모욕을 받은 것이 발단이었다. 모멸감을 참지 못한 청년이 분신으로 항거하자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회적 분노가 비등점에 도달한 것이다. 한번 끓기 시작한 민심은 아랍 전체로 퍼지며 체제를 뒤흔들고 있다.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 " - 앞의 시의 다음 행이다. 그 숨 막히던 암흑의 시간을 거쳐 오늘 한국이 민주사회를 누리고 있다. 아랍의 민주화 혁명도 같은 결실을 얻기를 바란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