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나와 전혀 상관없는 남자가 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는 나를 모르지만, 퍼런 색깔만 봐도 눈이 뒤집혀 달러($)로 보일 정도로 궁색했던 유학 시절이었다. 그랬기에 알바 기회가 있으면 이슬이 풀잎에 맺히기도 전에 일어나 집을 나섰고, 건물의 맥박 소리가 거친 숨소리처럼 들리는 밤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 시간들은 이제 거의 삼십 년 전이라는 기억 속에 갇혀 있다. 그런 격단(激湍)과 같은 세월 속에서도 그 남자의 그림자는 내 기억의 여울목에서 아직도 서성이고 있다.
나와 상관없는 그 남자는 호리호리한 키에 콧수염을 소복하게 기르고 있었다. 소금에 후춧가루가 뿌려져 있는 듯한 그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그의 콧수염은 온전한 검정이었다. 그의 책상머리에는 수확을 앞둔 과일 나무처럼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사진이 주렁주렁 붙어 있었다. 나이는 대략 두어 살에서부터 열예닐곱 정도. 사진 속 아이들은 여름 내내 들이키던 열을 소화해 내지 못해 뿜어내는 가을산과 같이 다양한 컬러였다.
매일 같이 그 남자 사무실에 들어서는 시간은 매우 일정했다. 아무리 늦게까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시간에는 모두 퇴근을 하고 없었기에, 나는 별 부담 없이 아주 느긋하게 사무실을 구경하곤 했다. 가끔 그 남자의 진짜 아이들을 찾아내는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그 놀이가 시들해지면 그 남자는 몇 번이나 결혼을 했을까 하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진 속 아이들의 피부와 생김새로 어림잡아 보면 최소한 세 번 정도는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 속에서 인자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이마를 콩 쥐어박아도 보았다. 그렇게 그 남자의 사무실을 정규적으로 들락거리면서 소설은 아니더라도 만화 한 권쯤은 쓰고 그 방을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관심은 벽에 붙은 사진에서 또 다른 볼거리로 옮겨졌다. 책상 건너편에 놓여 있는 반닫이 위에 나의 눈길을 확 사로잡은 물건이 있었다. 그 물건을 보는 순간 어! 하고 얕은 환호를 내질렀다. 그건 오랜 세월의 자락에 끌려온 남성용 흰고무신이었다. 고국에서조차도 쉽게 볼 수 없는 흰고무신이 이국만리에서 내 나라와는 무관한 백인 남자 사무실 한 공간에 떡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이후, 사무실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그 흰고무신 위에 얌체같이 앉아 있는 먼지를 털어 냈다. 흰고무신이 그 남자의 기억 속에 아직 살아 숨 쉬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잊혀지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세 명의 부인 중에 한국 여인이 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그 여인에 대한 동정심이 피어올랐다. 이제는 잊혀지고 없는 그 여자의 선물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 여자에 대한 미련이 조금은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여자가 이 남자를 버렸을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사연이야 어찌 됐든, 나는 그 남자의 눈길이 흰고무신에 잠시라도 머물길 바라는 마음으로 팔을 걷어 붙였다. 흰고무신 옆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들을 갓 이발한 머리처럼 깔끔하게 정리를 했더니, 흰고무신도 좀 더 단정하고 품격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잠깐이라도 스칠 수 있도록 흰고무신을 대각선으로 놓아 주고 그 일터를 떠났다.
그리고 세월은 살여울처럼 흘렀다.
어느 날, 우연히 한 편의 글을 읽게 되었다. 어떤 남자의 글이었다. 젊은 나이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 몸살을 앓고 있던 한국에 나가 선교 활동을 했다고 적고 있었다. 버려진 아이들과 굶주림에 지쳐 있는 모습을 보면서 다짐을 했더란다. 집으로 돌아가면 꼭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야겠다고. 그런데 그토록 염원하던 한국 아이 입양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그늘지고 구석진 곳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돌봐 주자는 것이었다. 그의 집은 언제나 아이들로 북적거렸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아이에서부터 사춘기에 이르는 아이들까지, 때론 본인의 아이들까지 합쳐 열다섯 명이 함께 북새통을 이뤘단다.
나에게 이마를 쥐어박히면서 약간은 이기적이고 플레이보이 성향이 있는 남자로 각인되었던 그 사람! 그의 글을 다 읽은 후, 난 그만 얼굴을 두 손에 푹 묻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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