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낄 수 있었다, 냄새 맡을 수 있었다 -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새로운 종류의 지능을."
지난 1996년 체스 세계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가 수퍼컴퓨터, 딥블루와의 경기를 끝낸 후 밝힌 소감이었다. ‘인간 대 컴퓨터’의 대결로 세계가 주목했던 경기였다.
IBM이 체스 기술을 집중적으로 입력해 만든 ‘체스 신동’ 딥블루는 그해 인간 챔피언을 꺾지 못했다. 카스파로프는 "지능의 징후가 분명 보이기는 했지만 좀 괴상한 종류, 비효율적이고 융통성 없는 종류였다. 그러니 내가 몇 년은 더 버틸 것 같다"며 안도했다.
그가 틀렸다는 것은 곧 바로 증명이 되었다. 1997년 한층 보완된 딥블루가 재도전해 카스파로프를 꺾었다. 1초에 2억 가지 체스 포지션을 좌르르 검토할 수 있다니 사람이 무슨 수로 대적하겠는가.
그리고 14년이 지난 이번 주 다시 흥미로운 대결이 펼쳐졌다. 미국의 대표적 퀴즈 쇼 ‘제퍼디’에서 사람과 컴퓨터가 맞붙었다. 제퍼디 사상 최다 연승 기록자인 켄 제닝스와 누적 상금 최고기록자인 브래드 러터가 사람을 대표했다. 결과는 컴퓨터의 완승이었다.
IBM 창업주 토마스 왓슨의 이름을 이어받은 왓슨은 ‘제퍼디’ 특유의 진행방식을 얄밉게도 잘 파악하며 게임을 주도했다. 백과사전, 책, 잡지 등 세상의 온갖 정보를 입력받고, 잊어버리지도 당황하지도 흥분하지도 않는 왓슨 앞에서 사람의 챔피언들은 두 손을 들었다.
컴퓨터가 우리 생활에 점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어떤 문제들에 척척 답을 하면 ‘걸어 다니는 백과사건’으로 불렸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제는 "저 사람 컴퓨터야!"라는 칭찬을 받는다. 1990년대 후반 부터였을 것이다. 그즈음 230여년 전통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2,300명 방문판매 사원 전원을 없애버렸다.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다 있는데 굳이 비싼 돈 주고 백과사전을 사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보 공유로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컴퓨터가 이번에 새로운 능력을 증명했다.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고 사람의 말로 대답하는 능력이다. 지능을 갖춘 기계, 인공지능이 한 단계 훌쩍 발전했다.
컴퓨터가 인간의 고유영역으로 한발 두발 걸어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번 ‘제퍼디’ 대결을 본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세 가지이다. 첫째는 기계발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이렇게 똑똑한 컴퓨터가 실용화하면 얼마나 편리할까 하는 기대감이다. 공상과학 영화 ‘스타 트랙’에 등장하는 컴퓨터가 모델이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충실하게 제공하는 도우미의 역할이다.
IBM은 이미 컬럼비아 의대, 매릴랜드 의대 등과 진료 도우미 개발에 합의했다. 의사가 환자를 보고 나면 그 증상들을 분석해 병을 짚어내고 치료법을 추천하는 컴퓨터이다.
다음 반응은 인공지능이 제기할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우려. 컴퓨터가 발전을 거듭해 생각도 하고 감정도 가진 로봇이 등장하면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아울러 기계가 너무 똑똑해져서 인류를 위협하는 사태에 대한 두려움도 제기된다. 공상영화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적과 적으로 만나는 상황이다.
가장 현실적인 반응은 줄어들 일자리에 대한 걱정. ‘제퍼디’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는 한 독자는 IBM의 인공지능 개발을 호되게 비난했다. 묵묵히 시키는 대로 일 잘 하는 기계가 있으면 어느 고용주가 사람을 채용하겠느냐는 것이다. 특별한 판단력이나 창의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초적 작업들은 모두 기계에게로 넘어가서 심각한 실업난이 초래될 것을 그는 우려했다.
기술의 발전이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과 분노는 역사가 깊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이 대표적이다. 당시 직물공업지대에 기계가 보급되면서 실업 위기에 몰리자 수공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들은 비밀조직을 만들어 기계를 때려 부수었다.
새로운 자동화 시스템이 등장하면 그 분야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형태로 다시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경제가 성장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컴퓨터, 혹은 로봇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지 상상하기 어렵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만은 확실하다. 가늠할 수 없는 그 세계가 아득한 지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다가온다는 것을 왓슨이 일깨워 주고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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