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의 늪으로 빠져들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봄이나 여름보다 가을이나 겨울 쪽이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든다. 그 계절의 갈피 속에서 낙엽과 추운 바람 사이로 너무 일찍 떠난 친구를 기억한다. 풍성한 눈이 아니라 진눈 개비와 같은 눈발, 춥기는 또 엄청 추워서 칼 같은 바람이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그런 겨울날 저녁, 문득 친구의 부음(訃音)으로 가슴이 메었던 날이 있었다.
저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그때의 서울과 겨울은 지금보다 빈곤한 겨울이었고 고통도 지금보다 더 짙었기에 삶을 놓고 떠나가는 사람 뒤에서 오열하는 슬픔을 깨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 수유리 세일극장 뒤에 살았던 한 선배와의 이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그는 대학 2년 선배였고 아주 준수한 청년이었다. 당시 나와는 학생시절의 그룹 활동으로 만났었고 대학교 근처 경찰서에 함께 드나든 인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낭만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으나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그런 추억들이다.
그런데 군에서 제대한 후 진로를 결정짓지 못하고 방황할 때 나는 그 형을 만나 그의 단칸 셋방에서 조용히 울분을 삭히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때 형은 지난날의 모든 행동과 생각, 그리고 부질없던 말들을 다 잊고 싶다고 했다. 객기와 치기가 범벅이었던 그 청춘의 흥분들을 대단한 애국이나 울분으로 위장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오히려 젊은 시절이 다 사라지기 전에 신과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데 신명을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니 그때 그는 무슨 교회를 다니고 있지도 않았고, 더 더욱 하나님을 말하지도 않았다. 서른을 조금 넘은 경점에서 어떤 강렬한 삶의 추구가 그의 마음 안에 일렁거렸다는 것인데, 그런 그가 며칠 뒤에 죽었다. 젊은 아내와 두 살짜리 사내아이를 남겨 놓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물론 자살은 아니었다. 더 충실한 인생을 살고 싶어 했던 젊은이였는데 아주 추운 겨울날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는 작은 골목이 끝나는 막다른 집에 살고 있었고 그날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에 그의 집을 찾았을 때, 장의사에서 매단 조등을 보며 터지는 슬픔과 눈물을 참았었다. 지금이 그때였다면 나는 그의 인생 안에 의미 있는 한 분을 소개했을 것이다. 우리들의 방황, 추운 겨울에 얼어붙은 젊음의 기로에서 우리가 알아야할 한 분을 소개했을 터인데, 나는 지금에서야 뒤늦은 내 무성의를 탓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 것인가. 그의 체취에서는 로버트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를 공감케 했는데 그는 어쩌면 그 나라를 동경하며 떠났을지도 모른다.
겨울에는 독특한 냄새가 있다. 그리고 겨울에는 까닭을 알 수 없는 정적과 고요가 있다. 어떤 때는 문득 내가 무슨 섬에 있는 건가, 고독한 순간이 엄습할 때도 있다. 아니, 우리들은 다 한 개씩의 섬인지도 모른다. 망망한 대양에 떠 있는 섬, 그러다가 풍랑이 일고 폭풍우가 몰아치면 그 작은 섬은 물에 잠겨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이 겨울은 그 섬에 내리는 눈발의 의미를 헤아리는 계절인 것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잔치 집보다 초상집에서 교훈을 얻으라고 이미 말씀하셨지만 정말 겨울은 죽음과 이별과 그리고 허무한 인생의 빈자리를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겨울에 인생을 깨달았다는 교만을 부리지 말자. 떨어질 잎사귀 한 잎도 존재하지 않는 벌거벗은 나목을 바라보며 저만치 마주 오며 굉음을 내는 세월이라는 이름의 기차, 그 기적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무엇이 나와 절대자의 사이를 막는 것인가. 겨울은 육신이 추운 게 아니라 영혼이 추운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였던 헨리 비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무덤 저쪽 나라 시민이 여기서는 방랑자이며 가난하고 이름 없는 부평초이다. 이쪽의 자유인이 저쪽에서는 포로처럼 갇힌다.” 인생에 대단한 것을 걸지 말자. 당신이 생각하듯 당신은 그렇게 용맹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내 안을 내가 들여다보는 그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더 혹독한 봄이 올지도 모른다. 다만 섬 같은 내 존재에 내리는 비와 빛을 그저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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