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렸다. 어깨에 내려앉는 눈송이 하나하나는 가볍기 그지없는 부피요 무게인데 그 눈송이들이 합해지면 무서운 힘으로 변한다. 나무를 통째로 넘어트리기도 하고 단번에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 폭설의 예보에 일찍 문을 닫고 퇴근길을 서둘렀지만 집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 아래에서 차를 멈춰야 했다. 언덕 위에 복병이라도 지키고 있는지 앞서간 차들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다가 항복을 하고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별 뾰족한 수가 없어진 나는 길가에 차를 세워둔 채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두 마일 남짓한 거리를 걷다보니 얼굴로는 거친 눈보라가 날아들고 발목은 쌓인 눈 속으로 푹푹 빠져 들어갔다. 사위는 적막하고 신호등 불빛만이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겨울 홍시처럼 공중에 걸린 채 바람에 흔들렸다.
느린 보폭으로 눈길을 걷고 있다 보니 지나치는 풍경 하나하나마다 그에 연계된 추억이 떠올랐다. 가까운 숲에서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저절로 꺾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렁그렁한 하늘이 눈발을 잔뜩 품고 내려와 있는 언덕을 오르고 있을 때, 문득 떠오른 풍경이 하나 있었다. 고개 너머에서 올라오던 가래떡 광주리를 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꼭 이맘때, 꼭 이런 눈이 내리던 날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방앗간에서 돌아오시던 어머니의 머리에는 아직 뽀얀 김이 올라올 것 같은 가래떡 광주리가 얹혀 있었고 반가워 뛰어가서 붙잡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에서는 겨울 들길에서 묻혀온 매운 삭풍 냄새가 났다. 설날은 그렇게 매서운 눈과 바람을 타고 왔다.
설날이 가까워오면 어른들은 모두 바빠졌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외양간과 토담에도 옷을 입혀놓는 일을 끝으로 한유해지셨던 할아버지도 다시 분주해지셨다. 설을 맞이하는 할아버지의 초꼬슴 일은 부엌 나무청에 장작더미를 가득 쌓아주시는 일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개다리소반 위에 팥을 쏟아놓고 뉘를 골라내시거나 고구마 조청을 고아 두시는 걸로 설맞이 준비의 서막을 올리셨다.
설날이 가까워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장 도막이나 두 장 도막 전에 사다놓으신 설빔을 안고 하염없이 설날을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불땀을 줄여놓고 고구마조청을 저으시는 가마솥전의 할머니를 지루하게 기다리거나 꽃잎모양의 약과를 찍어내는 어머니 곁에서 하품을 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서툰 풀무질로 장작불에 환한 불꽃을 일으켜보기도 하고 매작과에 칼집을 넣는 할머니 곁에서 밀반죽을 조몰락거리기도 해보았다. 할머니는 부엌바닥에 모지랑 빗자루를 깔고 앉아 천천히 풀무를 돌려 불꽃을 일으키시기도 하고 부지깽이 하나로 불땀을 죽이기도 하시며 요술처럼 음식을 만들어 내셨다. 고구마 한 광주리에 엿기름물을 섞어 달콤한 조청을 만드시고 홍두깨로 민 찹쌀반죽을 기름에 튀겨 부얼부얼 부풀어 오르면 조청과 튀밥을 묻혀 채반 가득 하얀 눈송이 같은 유과를 만들어 내시기도 했다.
섣달 그믐날 아침이 되면 어머니는 물에 불린 쌀 두어 말을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이나 되는 방앗간으로 가셨다. 추운 들길을 따라나서려다가 어머니의 손사래에 밀려 돌아설라치면 개울가 비스듬한 감나무 위에 앉아 있던 까치들의 깍깍거리는 울음소리가 내 정수리를 쪼아댔다. 약이 바짝 오른 나는 발치에서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어 감나무가지를 향해 던져보지만 돌팔매는 힘없이 개울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참에 애꿎은 개울물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홍시 몇 개가 빨간 꽃잎 되어 흩어졌다가 다시 자리를 잡기도 했다. 대문간에서 부엌간으로, 부엌간에서 대문간으로, 다시 대문간에서 동구밖 쪽으로 폴랑거리며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고개 너머로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나면 왈칵, 몰려들던 반가움의 기억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기다리던 설날은 그렇게 섣달 그믐날이 되어서야 어머니의 가래떡 광주리에 얹혀서 찾아왔다. 광목보자기에 덮여 시오리 길을 걸어오며 눈송이가 날아들기도 했던 가래떡 광주리. 어머니는 곡예사처럼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아직 말랑한 가래떡을 끊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쫄깃한 가래떡을 베어 물며 어머니 곁을 따라오던 날의 행복은 가래떡처럼 말랑거리고 따뜻했다. 하지만 고방에 갇힌 가래떡은 이내 꾸들꾸들 솔기 시작하고 밤이 되면 어머니는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떡살을 썰기 시작하셨다. 나는 어슷어슷 같은 크기로 잘려나가는 떡살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뜨거워진 아랫목에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잠이 들곤 했다.
굳은 가래떡은 물두멍에 담가 간수하였다. 부엌문 가까이 부뚜막에 묻혀 있던 물두멍에 빠져 살얼음에 갇히기도 하던 가래떡은 밥물을 넘긴 가마솥에 넣어 보드랍게 만들거나 화롯불에 구워서 먹기도 했다. 할머니는 장독대에 보관하셨던 달콤한 조청을 간장종발에 담아다 주시고 할아버지는 어린 손녀에게 첨세병이라는 가래떡의 또 다른 이름과 매작과라 부르기도 하고 타래과라 부르기도 하는 한과의 이름을 일러주셨다. 어린 나는 나이가 더해진다는 뜻의 첨세병이나 매화나무에 참새가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아 매작과, 실타래를 닮아 타래과라 한다는 한과의 이름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리라. 그저 화롯불 위에서 가래떡이 폭하고 소리를 내며 속살을 터트리는 순간을 기다리거나 생강냄새, 꿀 냄새가 나는 한과를 바삭바삭 소리 내며 베어 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해 겨울은 그렇게 깊어갔다. 한 뼘도 넘게 큰 치수의 새 옷과 지푸라기로 신발바닥을 재어가시고도 번번이 껄떡거리는 신발로 장만해주신 설빔을 입은 채, 남은 시루떡 귀부레기나 튀밥 묻은 약과 한 조각을 손에 쥐고, 그 달콤함에 마냥 행복해 하며 그해 겨울은 그렇게 깊어갔다.
요즘 아이들은 굳이 설빔을 기다리지도 않을 뿐더러 특별할 것도 없는 가래떡의 맛에 손을 내밀지도 않는다. 지금 당장 옷 공장이 생산을 중단한다 하더라도 지구엔 50년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축적되어 있다고 한다. 다가온 풍요는 반가우나 잃어버린 기다림은 아쉽기만 하다. 그 껄떡거리는 고무신 한 켤레를 기다려보지 못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도 분명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이따금 폭설도 내릴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을 모르는 아이들이 과연 폭설이 지나가는 인생을 견딜 수나 있을지, 나는 사뭇 걱정을 하면서 그믐께의 눈 내리는 언덕을 가래떡 광주리의 추억과 함께 가쁘게 오르고 있었다. (*초꼬슴-어떤 일을 하는 데서 맨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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