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을 짓기 위해 쌀 포대를 연다. 쌀을 퍼낸 다음 습관처럼 툭, 컵을 던져 넣다가 다시 집어 들어 쌀을 소복하게 담아 놓는다. 어머님께서 저녁밥을 지으시는 날에는 꼭 그렇게 컵에 쌀을 듬뿍 담아 쌀 속에 묻어 놓으시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시절부터 내려온, 쌀독을 향한 우리 어머니들의 작은 의식이기에 그 의미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작은 불편을 감수하며 따라하려 애를 쓰고 있다.
시어머님께서 오셨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데도 일하는 며느리를 도와주시려는 흔적이 역력하다. 오십이 넘도록, 또 칠십이 넘도록 따로 살던 사람들이 같이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도 사실이다. 일상에 출현하는 소소한 부딪침들에 잔뜩 긴장이 된 채 넉 달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눈 비비고 일어나면 주방부터 먼저 내려가지만 어머님은 욕실로 가셔서 몸단장부터 하신다. 나는 고슬고슬한 밥을 좋아하지만 어머님은 진밥을 좋아하신다. 나의 아침은 군고구마나 빵 한 조각에 커피를 곁들인 초간단식인데 비해 어머님은 제대로 된 아침밥을 드셔야 한다. 나는 피곤한 날의 저녁 설거지쯤은 눈 감고 이층으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어머님은 찻잔 하나라도 말끔히 닦아 놓으시려 한다. 나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청소기를 돌리는데 어머님은 적어도 이틀에 한번은 돌리시려 한다. 나는 세탁기에 빨래가 가득 차야 세탁기를 돌리는데 어머님은 매일같이 돌리신다. 나는 누레진 수건의 색깔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어머님은 세수수건에 뽀얀 색깔을 내기 위해 애를 쓰신다. 나는 그 수건의 끝을 안쪽으로 들어가게 접는데 어머님은 바깥쪽으로 나오게 접으신다. 나는 실내온도를 조금 내려놓고 두터운 이불을 덮는 걸 좋아하지만 어머님은 따뜻한 온도에 가벼운 이불을 덮는 걸 좋아하신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고 어머님은 드라마를 좋아하신다.
물론,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또한 다름은 서로 신기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매력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달콤해진 내 습관에 딴죽을 거는 다툼으로 변하기가 쉽다. 스물 몇 해 결혼생활을 하면서 터득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매력적으로 다가온 장점마저 끝까지 그 장점의 자리를 지킬 수도 없었으며 단점 또한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무언가 좋은 구석을 품고 있었다.
스무 살적의 나는, 나와 다르다는 묘한 매력에 끌려 남편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시골여학생인 나에게 성큼 다가온 도시남학생의 친절함은 신선했다. 처음 손을 잡으며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시구절을 외우던 그 남자의 문학적 지평은 나보다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그 남자의 눈에는 하늘색 스웨터와 청바지를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나의 조촐한 옷매무새, 달리 말해 촌스러움이 매력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내게 천년을 변하지 않을, 천사 같은 여자라는 이름을 달아준 건 순전히 그 남자의 착각이었다. 처음 사랑을 느낄 때는 그가 피우는 담배연기에서도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첫아기를 낳고 나서야 담배에는 애당초 향기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쓴 옛 편지에서 ‘그대의 부드러운 담배연기’를 운운하던 구절을 발견하고 어처구니없어 하기도 한다. 모든 다툼의 시작과 끝에는 담배가 거론되었으며 결국 그 남자는 담배와의 이별을 강행해야 했다. 예쁜 스웨터를 선물로 들고 온다던가, 감기에 걸렸다고 따뜻한 우유를 주문해주던 그의 세심한 배려에 여자는 감동했었다. 하지만 그 배려가 꼭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남자의 타고난 품성임을 알았을 때 또 실망한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될 자리에 넘치는 배려를 한다고 까탈을 잡기 시작하면서 그 여자는 앉아있던 착한 의자에서 내려진다. 마침내 천사 같았다는, 하늘색 스웨터의 그 여자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여자로 변신을 한 채 그 남자의 곁에서 평생을 쫑알대며 살아가고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다름은 다툼을 일으키다가도 곧바로 친화되어 품고 갈 수 있는 구석이 있는데 비해 여자와 여자 사이, 그것도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다름은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기 마련이다. 마치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현악기의 줄과 같다. 그것도 연분홍치마를 입고 있는 새색시도 아닌 며느리와 허허로운 인생의 벌판 끝을 걸으시는 시어머님과의 동거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나는 그 다름에 도전받지 않으면서, 그 다름에 섞여 살아갈 궁리에 골똘해 있는 중이다.
나도 세수를 먼저 하고 민낯을 다듬은 뒤 주방으로 내려온다. 고슬고슬해야 밥의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나의 미각에 진밥의 부드러움을 느껴보라고 주문을 해본다. 아침 주방의 깨끗함을 위해 밤의 주방 정리를 끝내는 수고를 견뎌본다. 청소기를 돌리는 건 어머님의 몫으로, 또 마루를 닦는 일은 내 몫으로 정한 뒤 일주일에 한 번씩 닦는 것을 고수한다. 빨래는 모든 가족이 샤워를 끝내고 나간 뒤 어머님 마음대로 하시게 둔다. 수건을 예쁘게 접는 것보다 리넨 장에 가득 들어 있는 수건의 숫자에 비중을 둔다. 실내온도를 다소 높여 놓고 어릴 때부터 약간 서늘한 온도를 쾌적한 온도로 길들여져 온 아이들의 방 창문을 눈곱만큼씩 열어둔다.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유리창에 부딪도록 볼륨을 높이고 듣는 내 음악적 취향을 주방에서 출퇴근길의 차속으로 옮겨놓는다.
처음 사귀는 친구처럼 어머님과 나 사이에서 찾아낸 같은 취향의 목록을 되뇌어본다. 어머님도 나처럼 꽃을 좋아하신다. 나물을 좋아하시고 따뜻한 숭늉을 좋아하신다. 뒤뜰에 찾아오는 새들을 좋아하시고 벽난로 속 마른 장작 타는 냄새를 좋아하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일생을 마치며 지상에 토해내는 마지막 향기라는 대목에 고개를 끄덕이시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식을 사랑하듯이 어머님도 어머님의 자식을 사랑하신다.
모차르트의 열세 번째 세레나데를 낮게 틀어놓은 채 아침밥을 짓고 있다. 고슬고슬한 밥과 진밥 사이의 절묘한 경계선쯤으로 밥물을 어림잡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모차르트는 귀여운 테마를 주고받는 1악장을 지나 꿈처럼 감미로운 안단테의 2악장을 연주하는 중이고 어머님은 뒤뜰에 계시다. 빈 나뭇가지 사이에 손자가 남긴 빵조각을 끼워놓은 채 새를 기다리고 계신 것 같다. 눈이라도 쏟아지려는지 우물 속처럼 깊어 있는 하늘은 조팝나무 가지 끝까지 내려와 있고 어머님이 기다리시는 새는 좀처럼 날아들지 않고 있다.
(pinkmd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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