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대 67명의 국무장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들을 손꼽자면 우선 19세기에 대통령직에 오른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존 퀸시 아담스 등 여섯 명을 빼고는 특히 20세기에는 조지 마샬과 헨리 키신저를 생각하게 된다. 2차 대전으로 쑥대밭이 된 유럽의 경제 부활을 가져와 서구 공산화를 방지한 마샬 플랜의 입안자였던 마샬은 아이젠하워가 소령일 때 이미 참모총장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5성 장군이기도 했지만 정치인들의 신망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트루먼 대통령이 사직하고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였었다.
키신저는 아마도 유일하게 외국 태생의 국무장관이었을 것이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15세 때 미국에 온 키신저의 가까운 친척들이나 친구들은 나치의 인종 말살 정책으로 희생당했다. 2차 대전 때 미군의 통역으로 활약했던 그는 하버드에서 외교정치학을 전공하고 교수로 남아있으면서 핵시대의 외교에 관한 많은 연구 논문 등으로 유명해졌고 닉슨 대통령 제1임기 때는 안보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윌리엄 로저스 국무장관은 키신저의 종횡 무진한 활약 때문에 완전히 빛을 못 보다가 1973년에는 물러나게 되어 키신저가 세계 외교 무대의 수퍼스타로 위치를 굳히게 된다. 주간 시사지에 수퍼맨 복장을 한 키신저가 표지 인물이 되던 시절이었다.
특히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1949)과 그 뒤를 이은 한국 전쟁(1950-53) 이후에도 1949년에 대만으로 피신한 국민당 정부가 중국 전체의 정부인 양 간주해오던 미국 외교 정책의 대변혁을 가져온 현실 정책(Realpolitik)의 추진자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바로 키신저다. 핑퐁 외교 정도의 교류만 간간이 있었던 미국과 중국과의 국교를 수립하기 위해 키신저는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모택동과 주은래를 만났고 닉슨의 중국 방문을 주선하는 등 그밖에도 많은 업적이 있어 한동안은 미국 태생의 시민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을 개정하여 그로 하여금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해야 할 것이라는 논의조차 있었다.
그같은 키신저가 최근에 닉슨과의 1분간 대화 녹음이 공개되는 바람에 심기를 몹시 상한 계기가 있게 된 것 같다. 부시 대통령 시절 연설 작성자였다가 현재 워싱턴 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마이클 거슨의 최근 칼럼 때문이다. 거슨은 키신저가 닉슨의 안보 보좌관으로 고국인 서독을 방문했을 때 서독 정부에서 그가 친척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언론에 흘렸었다는 내용을 칼럼의 첫 부분에서 언급한다. 그 때 키신저는 자기 수행원들에게 이렇게 격분을 토로했단다. “서독 정부 관리들이 무슨 개수작을 하고 있는 거야. 나의 친척들은 비누가 되지 않았나(What the hell are they putting out. My realtives are soap.). 거슨은 이어 1973년 3월1일자 닉슨의 녹음에 키신저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대해 경악을 표시한다. “사태를 정면으로 봅시다. 소련에서의 유대인 이민은 미국 정책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대인들을 소련의 개스실에 집어넣는다면 그것은 미국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도주의적 관심사일 수는 있습니다.“
거슨은 외교에 있어서 현실주의적 정책과 이상주의적 정책을 비교하는 글에서 그같이 쓴 바 있었는데 키신저의 반박을 금방 받았다. 우선 키신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에 많은 가족들과 친구들을 잃은 사람으로서 대학살에 사용된 개스실에 대한 언급을 한 것에 대해 부적절했었다고 사과를 했다. 동시에 키신저는 거슨이 소위 외교 정책 현실주의자들의 도덕 불감증과 그들의 비평자들의 인본적 관점과의 대조를 그리기 위해 키신저의 말을 인용한 것을 전후 문맥과 배경(context)이 없이 그리했기 때문에 즉 거두절미했기 때문에 역사를 제대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닉슨과 골다 마이어의 15분 회담 이후에 있었던 닉슨과 키신저의 그 대화는 소련으로부터의 유대인 이민을 미국의 최혜국 조항과 연계시키려는 두 명의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하도록 지시하는 가운데 있었으며 닉슨의 첫 임기 중 10만 명이나 유대인들이 소련에서부터 이스라엘로 이민을 오게 되었으니까 조용한 외교가 실익을 낳았다는 내용도 키신저의 반박문에 나와 있다. 그런데 바로 이틀 후에 키신저는 소련 유대인들을 구출하려는 노력에 대해 책을 발간한 전문가로부터 역사를 왜곡했다고 지적을 받았다. 닉슨의 첫 임기 중 소련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유대인들 수는 10만이 아니고 고작 4만5,000일 뿐 아니라 그것도 조용한 외교 때문이 아니라 핵무기 감축이나 경제 문제 등 미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을 자유로이 출국시켜야 한다는 공공연한 압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쉽지 않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해프닝이 아닐까 한다. 특히 실존하는 인물들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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