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운동 클럽들은 신입 회원들로 북적거린다. 그러나 운동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건강을 해치는 습관이나 요인들을 제거하는 일이다. 제거 대상으로 흡연, 음주 등이 단골로 꼽히는데 여기에 분노도 끼워 넣고 싶다.
분노만큼 위협적인 건강의 적도 없다. 분노는 미국 내 사망원인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심장 및 혈관 질환의 주범인 고혈압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쌓인 분노가 순간적으로 폭발하면 통제 불능이 되어 인명까지 앗아가는 비극적 종말을 빗기도 한다. 살다보면 의분에 떨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일상의 분노는 다 만수무강의 적이다.
예수님도 때로 화를 내셨고 언짢은 행동에는 부처님도 돌아앉으시는데 하물며 인간이 화를 안내고 살 수는 없다. 대인관계에서 생긴 분노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 길은 용서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웬만해선 부딪히지 않고 사는 나도 분노의 피해자가 될 뻔 했던 적이 있다. 어느 회식 자리에서였다.
P가 느닷없이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악몽 같은 그 순간을 끄집어냈다. 나와 함께 지난 어느 친교 모임에 참석했던 P는 그 날의 악몽을 비디오처럼 되살려냈다. 한 친지의 부탁으로 나는 그 모임에서 순서 하나를 맡았었다.
“30분을 약간 넘겨도 괜찮아요” 하는 말을 곧이듣고 준비했는데 알고 보니 10분 정도 배당된 순서였다.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했으나 마음이 조급해져 서두르는 바람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사회자도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20여분을 쓰고 허둥지둥 단을 내려오는데 뒤통수가 화끈거리며 영 벌레 씹은 기분이었다. 찜찜한 기분이 며칠간 이어졌으나 악몽 같은 기억은 곧 잊혀졌다.
P는 지루했었다는 등 나의 순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짐짓 태연한 척 했으나 속은 치미는 분노와 모멸감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내가 반론을 펴면 그는 얼씨구나 하고 한판 벌일 기세였다. 내막을 모르는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끼리끼리 대화를 나누면서도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P의 발언을 엿듣는 눈치였다. P는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털어놓고 다음 화제로 옮겨갔다.
분노를 안고 귀가 길에 올랐다. 말대꾸 한마디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공개석상에서 불쑥 행한 P의 인신 공격적 발언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머리가 베게에 닿기 무섭게 잠에 떨어지는 내가 홀딱 날밤을 새울 것 같았다. 혈압이 오르는지 뒷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장도 마구 벌렁대고 맥박도 엇박자로 제멋대로 뛰었다. 평상시에는 전혀 없었던 신체적 증세였다. 분노는 얼마나 심신을 탈진시키는 행위인가?
분노를 야기한 가해자 P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데 분노의 피해자는 잠 못 이루며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공평한 일이었다. 나의 분노가 P를 겨냥하고 보복을 벼르고 있는 한 나는 내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내 행복의 통제자는 P인 셈이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나도 몰래 전화기에 손이 뻗혔다.
전화기를 들고 잠시 나는 고조된 감정을 달랬다. 그가 사과를 거부하면 분노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지 않을까? 비방처럼 들렸지만 그것은 입에 쓴 양약 같은 충고가 아니었을까? 한 밤 자는 사람 깨워 따지는 것도 나쁜 매너가 아닐까? 내 귀가 칭찬에만 길들여져 사소한 비판에도 쉽게 마음이 상한 게 아닐까?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분노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이 야생마 같던 분노가 어느 새 순한 양처럼 순치되어 있었다. 나는 보복의 권리를 포기하고 용서를 통해 내 삶의 통제권과 행복의 열쇄를 P로부터 되찾아 오기로 했다. 내가 받은 상처가 한 때였다면 용서를 하지 않아 입는 피해는 무덤까지 따라갈 것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침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입술의 용서는 용서를 회피하려는 의도일 수가 있다. 용서가 잘못을 묵인하거나 용납하는 행위는 아니다. 아무튼 용서가 분노를 다스려 고혈압을 현저히 낮췄다는 임상실험 결과도 있으니까 용서는 베풀고 볼 일이다. 가장 이타적인 고귀한 행위인 용서는 또한 지극히 이기적이다.
황시엽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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