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 가족실 창가에 앉았다. 안개비가 내리나보다. 빗방울은 없는데 패티오가 젖어든다. 붉은 벽돌로 차곡차곡 높이 쌓아올린 가족실 벽난로에는 장작이 타닥타닥 타고 있다. 어머님께서 남기신 산세베리아 화분은 데일까 봐 벽난로에서 멀찍이 옮겼다. 통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뒷마당 핑크빛 장미는 하얀 벽을 타고 싱싱하게 피어올랐다. 여름날 내내 가뭄으로 물이 모자라 비실비실했다. 가뭄이 해소되어 물도 자주 주고 비도 몇 차례 내린 탓에 장미의 무성한 한 철을 뽐내고 있다.
세상은, 주변은 아름다움의 천지인데도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생각에 시달린 지난 한해였다. 속으로는 내내 울적한 나날이었다. 토마스 만이 묘사한 ‘마법의 산’ 속으로 들어가 지상의 삶을 잊어버리고 싶은 때가 많았다. 작가는 마법의 산이 절대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지상에서 생존의 선한 싸움을 할 때만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마음속의 도피행각을 몰아내려고 무던히 노력한 지난 해였다.
자랄 때 항상 혼자 있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사는 것에 흥미를 잃고 혼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나 떨어지는 낙엽,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을 즐겼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 삶의 덕목이 아님을 알기에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무척 애썼다. 교회생활은 그런 면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 또 다시 혼자 있고 싶은 그 병이 도지는 듯하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필요하면 미술관의 그림을 보거나 책을 읽으면 되었다. 그러니 사람들과의 친교에는 무심할 수밖에 없다. 지난주에는 마음이 답답하여 노튼 사이먼 뮤지엄에 갔다. 워싱턴 뮤지엄에서 나들이 나온 라파엘로의 ‘카우퍼의 성모’를 보면 뭔가 나의 이 답답한 마음에 해결책을 주리라는 기대를 안고 갔다.
라파엘로가 그림으로 나에게 말한 삶의 의미는 분명 있었다. 순하디 순한 양과 같은 희생, 맑고 부드러움, 순종,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말 것, 자력으로 뭔가를 해내려고 애쓰지 말 것, 모든 사물을 온화하게 다룰 것 등등 아직도 그는 나에게 붓으로 무수한 말을 하는데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하는 말을 좀 더 이해하리라는 기대로 지금도 마음속으로 그 그림을 깊이 묵상하고 있다.
굵은 유성 펜을 사용하여 크게 한글로 ‘삼푸’ ‘린스’라고 쓰서 드렸던, 어머님이 사용하다 남긴 것을 거의 다 써 가벼워진 용기를 흔들어 보았다. ‘포도씨 기름’이라고 쓰인 병들이 비어갈 때마다 미국에 함께 계실 때 좀 더 따뜻하게 해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인간의, 아니 나의 한계에 대하여 한없는 부끄러움을 확인하곤 했다.
고부간의 한계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실망감으로 이어져 우울했다. 그래도 어머님을 사랑했었고 젊은 날의 어머님의 뜨개질 솜씨, 털실의 색상 배합이 뛰어난 미적 감각, 마치 기계로 짠 듯한 고른 짜임새로 뜨는 집중력, 적은 재료로 맛깔나게 하시는 음식솜씨를 존경했었음을, 천국에 계신 어머님은 내 마음의 바닥까지 아시리라하고 위안을 삼는다.
저무는 한 해에는 그동안의 모든 묵은 감정은 내려놓으려 한다. 아픈 마음, 생각과는 달리 어긋난 행동으로 표출되어 일으킨 오해와 갈등들을 더 이상 되새김질 않고 다 흘려보내려 한다. 다가올 날들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로 새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손짓하는 ‘마법의 산’은 잊어버리련다.
비참하고 남루한 자괴심에 빠지면 성경책을 읽어 고귀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존재라는, 빛나는 그분의 자녀라는 실존을 자주 확인할 것이다. 못된 교만에 휩싸일 때는 역시 성경책을 읽고 벌레보다 못한, 부패하고 악취를 풍기는 이가 역시 인간임을 깨우쳐 겸손해지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생생한 지상의 삶을 라파엘로의 ‘카우퍼의 성모’의 분위기처럼 지극히 ‘온순하게’ 살 것이다.
토만스 만이 말한 ‘평범한 일상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본받을 것이다. 젖은 포도에 뒹구는 저마다 조금씩 다른 단풍잎의 아름다움에도 한없이 감격하는 그런 사소한 일상을 사랑하는 나날을 2011년에도 살아낼 것이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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