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은 아내를 열심히 사랑하고, 가사를 돕고, 아내를 존경하겠는가?" "예." "신랑은 아내에게 골드 신용카드를 주겠는가?" "아니요." 주례와 신랑의 이 문답에 하객들이 한바탕 웃었다. "신부와 결혼은 하겠는가?" "예."
"신부는 남편을 열심히 사랑하고, 남편의 일을 돕고 남편을 존경하겠는가?" "예" "신부는 신랑과 결혼하겠는가?" 신부가 침묵을 지켰다. 제법 긴 침묵에 하객들이 눈치를 살피는데, 신부가 갑자기 하객 쪽으로 뛰며 소리쳤다. "아니요! 그럴 순 없어요! 도대체 이런 사기가 어디 있어요? 골드카드도 안 주고!"
놀라 웅성거리는 하객 중 누군가 소리쳤다. "웬만하면 그냥 하지!" 또 다른 누군가가 외쳤다. "잘 했어. 골드카드도 안 주는데 결혼을 왜 해?" 몇 번 더 그런 외침이 있어 모두 또 웃음보를 터뜨리는데, 신부가 다시 신랑 쪽으로 뛰며 외친다. "아니요. 결혼할 게요. 이 반지도 사줬는데. 어디서 또 이런 사람을 만나겠어요!"
결혼식은 결국 신부가 "예" 한 후, 앞으로 55년 결혼생활을 잘 하라는 간단한 주례사를 끝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신혼부부는 밴드음악에 맞춰 피로연장 넓은 마루를 휩쓸면서 춤을 훌륭하게 춘 후, 하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하객 테이블을 돌던 신부 부츠가 우리 테이블에 오자, 샘이 사줬다며 큰 다이아몬드 반지 낀 손을 앞에 들이민다. "어때? 제법 크지? 이번 결혼선물이야." "재미있었지? 결혼식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어서, 이번엔 재미있게 하려고 연극을 좀 섞었지." "이 드레스 어때? 몇 달 전에 사놓고는 살찔까 봐 다이어트 했어." 진주 장식 새하얀 드레스로 드러난 어깨와 등의 맨살에 붙은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모델 흉내를 내는 부츠를 더욱 예쁘게 빛냈다.
샘과 부츠 커플과는 7년 전 신시내티 오페라단의 엑스트라를 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투란도트’의 마지막 회 막이 내리자마자 없어져서 찾는데, 잿빛 누더기 옷을 입었던 그들이 갑자기 턱시도와 빨간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사진을 찍어 달라며 무대 중앙에 춤추는 모습으로 섰다. 극장이 곧 잠기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130년의 웅장하고 정교한 실내장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직홀 무대에서, 3,500개 빈 객석을 배경으로 시간에 쫓기며 선 그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요술의 밤 파티장의 신데렐라와 왕자님이었다. 그 해 말, 그 사진이 담긴 크리스마스카드를 받았다.
오페라 엑스트라는 임금도 없고 노래는커녕 입도 못 열게 하지만 지원자가 많아서 뽑히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데, ‘투란도트’ 때 부츠가 이런 말을 했다. "74세인 나를 뽑았겠어? 64세이라고 했으니까 됐지." 고운 몸매에 자세도 곧고 움직임도 빠른 그녀는 멀리서 보면 30대였다. 개인사업과 가사에 열성이고 즐기는 일도 열심인데, 거의 평생을 일주일에 2~3번씩 샘과 함께 춤 연습장을 갔다니 그럴밖에.
2주 전의 그 결혼식은 그들의 결혼 55주년 행사였다. 은혼식과 금혼식 때도 했고, 앞으론 5년마다 결혼식을 할 꺼라 한다. 둘 다 80을 넘겼지만 주례 말대로 또 한 번의 55년을 무난히 지낼 것만 같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함께 춤추고 여행 다니는 친구 부부들도 그렇다. 150여명 하객의 반이 80대이고 90대도 10여명이 넘었는데, 어깨가 굽었어도 신나게 춤추는 그들 역시 영원히 그렇게 살 것만 같다.
정장 파티라 모두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는데, 92세의 한 꺽다리 할아버지는 턱시도에 안 어울리게 뒤축에서 빨간 불이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부인 할머니와 멋지게 춤을 추어 사람들의 미소를 자아냈다. 젊은 사람들 파티에서라면 손님인 나도 분위기 깬다고 민망해 했겠지만, 그 할아버지라면 시선 끌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부부가 준, 그들 얼굴사진이 프린트된 새알 초컬릿들은 아까워서 아직도 안 먹고 서랍장에 넣어두었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그 서랍을 열어본다. 그들의 에너지가 내게 초컬릿처럼 달게 전해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보경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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