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황이 왕따를 당했나? 검정색 고무 샘플이 하루 밤새 서리를 맞은 듯 허옇게 변해버렸다. 실험 중인 처방전을 살펴보았다. 화학 결합제인 유황이 적정량을 지나친 게 틀림없다. 고무의 왕따 현상을 관찰할 때마다 한국 청소년들의 왕따가 떠올라 기분이 울적해진다.
고무의 세계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인간사회와 닮은 구석이 꽤 많다. 특히 고무 원료들의 화합과 협동이 인간사회 못지않게 중요하다.
떡 주무르듯 고무 반죽을 주무르며 산지도 30년이 넘었다. 고객이 원하는 고무제품의 처방전을 쓰고 실험을 통해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검증을 하는 게 나의 일이다. 그 동안 개발한 고무 처방전이 2천개가 넘는다. 고무제품에는 주성분인 폴리머(polymer)를 비롯해서 탄소 가루, 기름, 항산화제, 화학결합제등 보통 열 댓가지의 원료가 들어간다. 한마디로 고무라 부르지만 그 용도에 따라 처방전이 천차만별이다.
화씨 600도까지 견뎌내는 고무가 있고 영하 100도 이하에도 얼지 않고 노글노글한 고무가 있다. 고무도 얼면 돌처럼 굳어져 제구실을 못한다. 방사능, 황산, 고압 증기 같은 역경을 잘 이겨내는 고무도 있다.
흔히 고무가 전기절연체로 쓰이지만 전기가 통하는 고무도 만들 수가 있다. 유방 등 여성의 몸 안에 들어가 호사하는 실리콘 고무에다, 로켓 단열재로 쓰여 우주선 타고 화성에 간 우리 회사 고무도 있다.
기억력이 탁월한 고무가 있고 치매 끼가 있는 것도 있다. 기억력이 좋은 고무는 오랫동안 외압에 의해 크게 변형이 되었다가도 원형을 되찾는 능력이 강하다. 대개 기억력이 좋은 게 성능 좋고 인기도 좋다. 그러나 치매 끼 있는 것도 제 용도가 있다. 1파운드에 2달러도 안 되는 싼 고무에서 부터 2000 달러 넘는 특수 합성고무 등 종류만 해도 천연고무를 비롯해서 20여 가지나 된다.
고무의 세계에는 팔방미인이 없다. 만병통치약도, 독불장군도 없다. 2000 달러짜리가 장점이 많다고 우쭐대도 2 달러짜리의 용도를 대신할 수 없는 경우가 적잖다. 싼 고무도 제 용도가 있으니 ‘싼 게 비지떡’이 아니다. 나이, 외모, 학벌, 성격에 집안까지 좋은 조건을 고루 갖춘 이상적인 배우자감은 있을지 몰라도 이 같은 이상적인 고무는 찾아볼 수 없다. 장력과 신장률이 뛰어난 천연고무는 내유성과 내열성이 나쁘다. 외모가 번듯하면 성격이 고약하고 학벌은 좋은데 나이가 많다는 식이다.
고무의 세계에서도 ‘중용의 도’가 중요하다. 그래서 고무처방전을 개발하는 기술을 ‘양보의 기술’ 혹은 ‘타협의 기술’ 이라고 부른다. 인간 사회에서도 양보와 타협이 중요하지 않은가.
능력도 중요하지만 어느 조직에서나 성격을 중시하는 것은 화합을 통한 팀워크 때문이다. 고무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소위 ‘블룸(bloom)’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현상을 한국에서 집단 따돌림을 지칭하는 ‘왕따’에 비유하여 ‘고무의 왕따 현상’이라고 부른다. 고무 속에 섞여있어야 할 물질이 밖으로 쫓겨나 겉도는 현상이다.
역할이 다른 모든 원료들이 골고루 잘 섞여 한 몸이 되어야 좋은 제품이 나온다. 고무 원료들은 주원료인 폴리머와의 친화도에 따라 신중하게 선택해서 적정량을 넣어야 한다. 적정량을 지나치면 초과분이 왕따 되어 고무 표면으로 밀려나오게 된다.
고무원료로 많이 쓰이는 기름의 친화도를 무시하고 과량 사용하면 고무 표면이 기름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고무의 왕따 현상은 왕따 당한 원료를 가려내 그 양을 줄이거나, 친화도가 보다 높은 대체 원료를 쓰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그러나 인간들의 왕따는 얼마나 비이성적, 비논리적, 비인간적인가. 왕따 당해 얼마나 외롭고 괴로우면 자살까지 할까? 왕따는 영혼을 말려 죽이는 가장 잔인한 계획적 만성 살인행위이다.
간혹 인간이 고무만도 못하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사회적 동물’이란 인간이 무리 지어 왕따를 자행하다니…. 왕따를 당하면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홀로 내팽개쳐진 듯 얼마나 외로울까? 어느 프랑스 시인의 시가 언뜻 떠오른다.
’사막에서 홀로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도 해보았지, 앞에 찍힌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싶어서’
2008년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왕따’가 왕따 되어 사라지는 날은 언제쯤일까?
황시엽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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