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져 내리는 수요일 오전이다. 설거지와 집안 정돈을 마친 후 식탁 위의 꽃병에서 꽃을 꺼내 시든 잎과 밑둥을 잘라낸다. 작은 꽃병으로 옮겨 싱싱하게 보이도록 꽂는다. 월요일이 나의 생일이라고 아이들이 지난 토요일 사 온 거베라 꽃다발이다. 특별한 날에는 꽃 선물이 하나쯤 있어야 좋다.
두툼한 양말을 신고 운동화 끈을 졸라맨다. 쌀쌀한 날씨 탓에 청바지와 노란색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오늘은 내가 나에게 생일선물을 하려는 날이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할 일이 있었고 수요일에 한가한 틈이 났다.
나의 경우는 내가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이 가장 큰 의미가 있다. 아이들이 주는 선물은 대체로 무심한 편이다. 선물보다는 함께 모여 식사하면서 다정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최고의 선물일 테다. 생일 선물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빗속 프리웨이를 달려 게티 뮤지엄으로 간다. 생일날 게티 뮤지엄 관람은 세번째이다.
산꼭대기로 오르는 트램 속에는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절반 정도 되었다. 빗속에,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한 살이 채 안되어 보이는 세쌍둥이를 데리고 뮤지엄에 온 젊은 엄마도 눈에 띈다. 맨 앞 시트에는 자그마한 우산까지 달린 3인용 유모차를 밀고 게티 뮤지엄으로 가는 것이다. 이처럼 모두에게 매력적인 곳이 게티 뮤지엄이다.
세상사 얽힌 시름은 저 아래 내려놓고 산꼭대기 신선처럼 거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멋진 미술품이 있고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이 있고 가지각색의 꽃이 핀 천상의 정원이 있는 곳이 게티 뮤지엄이다. 천국도 아마 이런 곳이리라.
정상에 올라 뮤지엄 바로 앞에서 트램을 내려 초록색 우산을 펼쳤다. 사람들은 뮤지엄 측에서 마련해 항아리 속에 담아둔 베이지 색 우산을 폈다. 입구 안내 빌딩을 벗어날 때 내 우산은 가방에 집어넣고 얼른 베이지색 우산을 집어 들었다. 하얀 화강암 빌딩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베이지색 우산을 쓰고 있는 모습이 더욱 어울려보여서이다.
높은 곳에 올라온 느낌을 누리고 싶어서 전망 좋은 곳으로 간다. 남서쪽 먼 바다 위로 삼사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날아오른다. 남동쪽으로는 윌셔 길을 따라 높은 빌딩이 이어지다가 LA 다운타운 옹기종기 모인 빌딩들이 보인다. 비와 시커먼 구름 탓에 온통 회색인 빌딩 속, 사람들은 대부분 이 시각에 각자 주어진 일들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계속했던 견고한 일상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 년에 몇 차례 오게 되는 이곳에서의 나의 코스는 항상 같다. 맨 처음 특별전시장을 관람한 후 그 다음 가든 테라스 카페에서 점심을 먹고 정원 산책을 한다. 그런 다음 인상파 그림을 모아둔 서쪽 전시관을 반드시 들리고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나머지 전시관을 둘러본다.
정원에는 장미, 글라디올러스, 개망초 등 수많은 꽃이 피었지만 오늘 나의 눈에는 오로지 지천으로 핀 다알리아만 보인다. 노란색, 빨간색, 보라색, 진홍색, 자주색, 하얀색, 가장자리가 하얗게 물든 빨간색 등 모든 종류의 다알리아 꽃송이가 정원 곳곳에 탐스럽게 피어있다. 어느새 마당에 다알리아가 만발했던 유년의 한 풍경으로 나를 데려간다. 충만했던 시절의 행복이 밀려온다.
게티 뮤지엄에 올 때마다 오래도록 머무는 그림이 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두개의 밀짚더미가 있는 겨울 아침의 풍경이다. 모네가 그린 그림이다. 밤새 눈이 내린 날 아침, 아폴론(태양)이 샤프란색 베일을 걷으며 밀 짚단 위로 나타나는 그림이다. 당연 만물을 깨우는 리라를 연주하면서이다.
그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벅찬 감동에 휩싸인다. 춥고 시린 겨울날 아침 눈 위를 비추는 연분홍 햇살은 큰 위로가 되었다. 햇살은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품게 하는 묘하고 강한 힘이 있었다. 지나고 보니 그렇다. 인생은 항상 힘든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아침 햇살처럼 따뜻함이 밀려오고 근심걱정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멋진 그림에 열중하다 보면 세상은 그림 속 풍경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 속에서 한 풍경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역시 여행은 생일날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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