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사를 오던 날, 첫 눈에 내 눈밖에 났던 관목이었다. 집 입구 오른쪽 벽을 기대고 서있는 이 관목은 꼬락서니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밑동에서 제멋대로 뻗어 나온 손가락 굵기의 가지에다, 벌레 먹은 잎사귀들은 배배 꼬여 비틀려 있었다.
미운 털이 박힌 이 관목은 잡초처럼 빨리 자랐다. 나는 자라기가 무섭게 가위질을 해대며 전 집주인을 향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것도 나무라고 집 입구에 심어 미관 해치고, 대물려 나까지 생고생을 시켜···· ”
투덜대며 가지치기를 두어 달 하다 보니 이 관목이 어쩌다 운 좋게 뿌리내린 잡목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잡목을 제거하기로 작심했다. 귀찮은 가지치기도 당연히 중단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잡목은 제 세상 만난 듯 가지와 잎을 빠르게 키워냈다. 그런데 내가 대체할 멋진 나무를 구하러 쏘다니며 차일피일 뽑기를 미루는 동안 ‘미운 오리새끼’ 같은 잡목이 백조의 꿈을 안고 비상을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집 안에 향수를 다 뿌리고… 오늘 귀한 손님이라도 왔었나?”
그 해 초여름 밤, 집 안으로 들어서던 나는 때 아닌 은은한 향수 냄새에 내 코를 의심하며 집 사람을 추궁했다. 집 사람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향수 좋아하시네”
신비스런 향내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코를 벌름대며 사냥개처럼 온 집안을 샅샅이 탐색했으나 허사였다.
“향내를 밖에서 몰고 들어왔구먼”
“밖에서? 어떤 미친놈이 온 동네에 향수 세례를 베풀고 다녀?”
코를 따라 나는 열려 있는 문밖으로 나갔다. 짙은 향내가 코 안으로 확 밀려들어오며 잠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순간 나의 얼굴이 잡목 깊숙이 묻혀버렸다.
잡목은 이미 백조로 변신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살펴보니 잎사귀 사이마다 숱하게 피어난 트럼펫 모양의 작은 꽃들이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2센티미터 길이의 가는 화관에 달린 별모양의 꽃은 옅은 연두 빛이어서 무성한 잎사귀에 가려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불평의 상대였던 전 집주인을 향해 나도 모르게 찬사가 흘러나왔다.
“아! 이렇게 멋진 향나무를 집 입구에 심어놓다니…”
뒤늦게 수소문해서 알아낸 잡목의 이름은 나잇 불루밍 재스민(Night-blooming Jasmine). 중앙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가 원산지인 다년생 관목으로 봄부터 늦가을까지 꽃을 피우며 짙은 향기를 뿜어댄다.
그런데 신기한 현상은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는 밤에만 향기를 뿜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붙여진 별칭이 ‘밤의 여왕’. 한국에서는 ‘기생 꽃나무’로 불리기도 하고 중국에서는 ‘야래향’으로 예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올해도 4월 말부터 봉오리를 틔워 두 달 남짓 향기를 선물한 ‘밤의 여왕’이 9월 들어 또 꽃대롱을 열어 향기를 뿜어대고 있다. 한밤 이층 서재 창문 사이로 솔솔 스며들어오는 향내를 맡으며 나는 깊은 상념에 젖었다. ‘밤의 여왕’을 몰라보다니…
나무마저도 왜 겉만 보고 판단했을까?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대상이 어찌 나무뿐이랴. 영국 탤런트 쇼에 출연해서 단번에 세계적 스타가 된 40 후반의 독신 뚱보가수 수잔 보일 케이스처럼 나이 들고 못 생기면 노래 솜씨도 별 볼일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나도 갖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첫 무대에서 그녀에게 보냈던 심사위원들과 관중들의 냉소와, 냉소를 삽시간에 감동과 열광적인 기립박수로 바꾼 그녀의 열창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장래가 보장되는 컴퓨터 공학을 중도 포기하고 언어학을 전공한 외아들이 한때 잡목처럼 한심하게 보였으나 그는 대학졸업 후 2년 간의 미 육군복무에 이어 신학대학원을 소신껏 마치고 현재 미국 교회 부목사가 되어 향나무처럼 살고 있다.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사람을 키울 줄 아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인생의 큰 축복이다. 나를 찾아 왔던 수많은 기회나 인연 가운데 나의 무지로 놓쳐버린 재스민은 과연 몇 그루나 될까? 재스민은 돼지 앞에 던져진 진주였다. ‘밤의 여왕’이 인생의 스승처럼 오늘 밤도 나를 깨우쳐준다.
황시엽 /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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