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 빌리 와일더가 감독한 약간 한기가 나는 달콤쌉싸름한 코미디 ‘아파트먼트’(The Apartment·1960·사진)가 올해로 개봉 50주년을 맞았다.
이 영화는 할리웃의 구습 타파자로 알려진 와일더가 성공을 위해서는 부도덕도 마다 않는 미 화이트 칼러 직장인들을 한 입에 씹었다 내뱉는 따끔한 비판이요 조소이자 삭막하기 짝이 없는 대도시 사무실 안의 비인간적 삶을 칼침을 놓는 듯한 유머로 묘사한 흑백 걸작이다.
와일더는 영화의 아이디어를 데이빗 린 감독의 두 중년 남녀의 못 이룰 사랑을 그린 보석 같은 흑백 소품 ‘짧은 만남’에서 얻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밀회를 위해 남자의 친구가 빌려 준 아파트에 들어가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정사를 포기하고 아파트를 나온다. 와일더는 이 영화를 보고 자기 아파트를 타인의 밀회장소로 빌려주는 사람의 얘기를 구상했다.
이 아파트의 주인이 뉴욕의 보험회사 말단직원인 C.C. 백스터(잭 레몬). C.C.는 착하나 아첨꾼이요 족제비 같은 인간으로 승진을 위해 자기 아파트를 직장 상사들의 밀회장소로 돌아가며 빌려준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와일더는 출세를 위해 회사 사다리를 삐딱하게 이용하는 C.C.를 통해 미국의 결점과 실수와 꿈 등을 우아하면서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반세기 전 영화지만 요즘에 봐도 현실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에서 직장인들이 술 마시고 담배 태우고 흥청대면서 외도하는 모습이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AMC-TV의 드라마 ‘매드 멘’을 생각나게 한다.
C.C.의 상사인 인사부장 제프 쉘드레이크(프레드 맥머리)는 C.C.의 부업 소식을 듣고 C.C.를 벼락 승진시켜 준 뒤 아파트 열쇠를 독차지한다. 마침내 C.C.의 아메리칸 드림이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C.C.가 제프의 애인인 회사 엘리베이터 걸 프랜 쿠벨리크(셜리 매클레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삼각관계가 이뤄지는데 뒤늦게 C.C.가 자신의 부도덕함을 뉘우치고 제프로부터 아파트 열쇠를 회수한 뒤 회사를 때려치우면서 얘기는 끝난다.
오스카 작품, 감독 및 각본상을 받은 이 영화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코미디인데(묘하게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러브 스토리는 ‘짧은 만남’이다) 코미디치곤 다소 스산하고 어둡고 멜랑콜리하며 또 톤이 착 가라 앉았다. 코미디에 능한 레몬과 매클레인의 연기도 매우 절제됐는데 둘의 콤비가 절묘하다. 둘 다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와일더는 수수한 보통 사람과도 같았던 레몬을 자기의 분신처럼 여기고 여러 편의 영화에 기용했다.
C.C.와 프랜은 부도덕과 권모술수와 치열한 생존경쟁 속의 순수를 상징하는데 늑대 무리 가운데의 사랑스런 양들이요 숲 속에서 길 잃은 아이들 같다. 이런 순수성이 이 영화의 정수라고 하겠다.
나는 이 영화를 고등학생 때 봤는데 소년의 가슴이 깊은 감동에 젖었었다. 코미디인데도 쓸쓸해 더욱 좋았는데 지금도 기억에 뚜렷한 장면은 C.C.가 프랜이 제프의 정부라는 것을 알고 크게 낙심, 허름한 바에 들러 술을 마시는 장면.
C.C.는 대취해 역시 고독을 달래려고 바에 들러 술에 취한 여자와 볼을 맞대고 춤을 추는데 가슴을 싸하게 만들어 주면서도 키들 키들 웃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 때 나오는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상케 만드는 음악이 참 좋다.
영화는 당시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좋아했는데 그는 특히 매클레인의 연기(맹하고 약간 신경질적인 귀여운 연기다)에 반해 뉴욕의 유엔 총회 참석 때 통역을 통해 매클레인에게 팬으로서의 찬사를 전달했다고.
와일더는 비엔나와 베를린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1933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왔는데 그 때만해도 영어 한 마디 못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신맛이 나도록 매섭고 눈물이 나도록 우스우며 또 정곡을 찌르는 대사로 가득한 코미디의 대가로 성공했는데 와일더는 그 어느 미국 본토 사람보다도 더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한 각본가요 감독이었다.
와일더는 비록 코미디뿐 아니라 ‘이중 배상’과 ‘선셋 블러버드’와 같은 범죄영화와 드라마에서도 기억에 남는 대사들을 많이 남겼다. 와일더의 가장 유명한 대사는 아마도 역시 잭 레몬이 나오는 요절복통 코미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여장을 한 레몬을 사랑하는 함지박만한 입을 가진 부자 늙은이 조 E. 브라운이 내뱉듯이 던지는 마지막 한 마디 “노바디즈 퍼픽”일 것이다.
‘아파트먼트’는 후에 ‘약속들, 약속들’이라는 연극으로 만들어져 브로드웨이에서 빅히트를 했다. DVD를 빌려다 꼭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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