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 인간이 되고파 몸부림치는 비정한 살인자 탐 리플리는 ‘미 문학의 다크 레이디’라 불린 패트리샤 하이스미스(1921~95)의 자식이자 분신과도 같은 사악한 인간이다. 하이스미스의 최초의 성공작인 ‘재주꾼 미스터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의 주인공 리플리의 간교함과 비도덕성은 이 글을 원전으로 한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 알랭 들롱에 의해 매섭고 완벽하게 구체화 된 바 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이 영화를 명동극장에서 보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 웃통을 벗어 제친 들롱의 비수의 치명성과도 같은 새파란 눈동자에 매료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 때 별 볼일 없는 인간 리플리가 자기를 무시하는 부자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이 마치 카뮈의 뫼르소의 살인 이유인 뜨거운 태양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리플리는 맨발에 간편화를 신었는데 이 간편화는 풀 먹여 다린 흰 셔츠에 리바이스 청바지를 즐겨 입던 하이스미스가 잘 신었던 것이기도 하다. 간편화를 비롯해 항상 최고를 원하고 직장 인터뷰에서 줄줄이 낙방하고 또 자존에 실패했던 것 등 하이스미스와 리플리는 같은 점이 많다.
조운 셴카가 쓴 미 범죄소설의 천재 작가 하이스미스의 전기 ‘재주꾼 미스 하이스미스’(The Talented Miss Highsmith-St. Martin’s·684쪽·사진)는 자기 소설의 주인공처럼 어둡고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인 스미스의 삶과 개인적 면모 그리고 그의 작품을 지적이요 분석적이며 또 광범위하고 통찰력 있게 해부한 훌륭한 책이다.
텍사스에서 출생해 뉴욕에서 자란 하이스미스의 작품 중 가장 대중에게 잘 알려진 것은 ‘재주꾼 미스터 리플리’와 함께 히치콕이 영화로 만든 ‘열차 안의 낯선 사람들’(Strangers on a Train)이다.
이 두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하이스미스는 호모와 걸맞지 않는 두 남자 간의 관계 그리고 살인과 위조와 리스트와 도면 등을 글의 주제로 삼았다. 호모요 줄담배를 태우는 술꾼(큰 가방에 진과 보드카와 스카치 플래스크를 넣고 다녔다)이자 유대인과 흑인과 한국인 등 자기와 다른 모든 인종을 싫어하고 가톨릭에 반대했던 하이스미스는 암흑적 천재성을 지녔던 작가였지만 한 마디로 말해 ‘비치’(bitch)였다.
전기의 서론도 ‘그 여자는 나이스하지 않았다’로 시작된다. 하이스미스는 ‘삶은 범죄 없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악마의 제자였다. 어찌 보면 사이코다. 이런 사이코 기질은 그가 적은 아이들의 작은 범죄리스트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으로 ▲층계 맨 위에 줄을 매 어른들이 걸려 굴러 떨어지게 한다. ▲수면제를 아스피린 병에 담는다. ▲쥐약을 밀가루 항아리에 담는다 등을 적고 있다. 하이스미스는 또 비판적이요 변덕이 심한 어머니와도 심각한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는데 어머니의 젖가슴에 가위를 꽂은 뒤 비틀어 죽이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는 불편함을 가장 편하게 느끼면서 거기서 창작의 동력을 얻었는데 언제나 범죄와 일탈의 한계상황 안에서 살았던 모순의 인간이자 최소한 동시에 두 사람인 이중인간이었다. 해괴한 매력적 인간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플롯 포인트를 자주 차용한 그의 작품 속 인간들도 모두 선의가 부식하고 사악하며 인간성이 결핍된 마치 딴 세상의 사람들과도 같다. 한 출판업자는 하이스미스를 ‘끔찍한 여자’라고 불렀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 여자가 얼마나 무례하고 이기적이며 구두쇠인 데다가 오만하고 어두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희대의 괴물이다.
죽음에 집착한 하이스미스는 또 사랑을 죽음의 파트너로 여겼는데 사랑에 살고 죽고 살인하는 것이 작품의 주제로 자주 이용된다. 그는 사랑을 그 행위로 한 사람은 죽는 두 사람 간의 감정적 절박함으로 여겼는데 생애 수없이 여자와 사랑을 하고 남자와도 관계를 가졌었다.
삶의 나중 절반을 유럽에서 보내 미국보다 유럽에서 우상이 된 하이스미스는 광대뼈가 뚜렷한 고양이 같은 용모의 자그마한 여자로 많은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이었는데 손과 발(9½인치 구두)이 유난히 컸다. 그래서 그는 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열차 안의 낯선 사람들’에서처럼 몇 작품에는 구두가 글의 영감으로 작용했다.
하이스미스의 1947년 신년 축배는 ‘내가 싸우는 모든 악마, 욕정, 정열, 탐욕, 시기, 사랑, 이상한 욕망, 혼과 실제의 적, 기억의 무리들에게 축배를 -그들이 결코 내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기를’이었다.
*지난 칼럼의 제목 ‘로텔 드 빌의 키스’(Le Baiser de L’Hotel de Ville)의 뜻은 ‘시청 앞의 키스’입니다. 시청을 마치 호텔 이름처럼 인식토록 쓴 것은 제 불찰입니다.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박흥진의 주말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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