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오페라하우스인 다운타운의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 정문을 들어서면 로비 오른 쪽에 흉상(사진)이 하나 보인다. 이 사람이 지난 1933-39년까지 LA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독일인 오토 클렘페러이다.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던 클렘페러가 당시만 해도 클래시컬 음악의 황무지이다시피 한 LA의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된 것은 순전히 히틀러 때문이다. 바그너광인 히틀러는 1933년에 집권하면서 유대인들과 아방가르드 음악인들을 박해,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도주했다.
클렘페러는 자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떨어지자 마지못해 LA 필의 지휘자 자리를 수락했는데 그는 LA에 도착 후 처음에는 “아이구 하느님, 이렇게 지적으로 결핍된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한탄을 했었다.
그러나 클렘페러는 LA 필의 바톤을 잡으면서 베토벤과 브람스 등 대중에게 익숙한 곡을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을 적극 지원하고 또 지휘, LA 클래시컬 음악의 지평을 넓히고 또 향상시킨 장본인이다.
히틀러 때문에 유럽의 저명한 음악가들이 미국으로 도피, LA에 정착하면서 어떻게 이들이 이 도시의 클래시컬 음악과 음악인들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기술한 ‘남가주의 망명 음악가들’(A Windfall of Musicians-Yale사)을 읽었다.
저자 도로시 램 크로포드는 이들 음악가들이 LA로 대거 몰려들면서 어떻게 이 태양과 영화의 도시가 잠깐 동안 클래시컬 음악과 그 미래의 본산지가 되었는가를 재미있고 유익하게 상술하고 있다. LA는 그 짧은 기간에 전 세계의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음악적 재능이 집중되었던 곳이었다.
당시 LA에서 활동한 음악가들로는 클렘페러 외에도 아놀드 쇤버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브루노 발터(할리웃보울의 뮤지엄에 가면 그가 보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필름을 볼 수 있다), 쿠르트 바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로테 레만, 그레고어 피아티고르스키 및 요셉 시게티 등 기라성과도 같은 음악가들이 있었다.
많은 음악가들은 처음에는 클래시컬 음악이 터를 잡은 미 동부로 이주했다. 그러나 동부의 보수성과 함께 경제공황으로 인한 일자리 부족으로 이들은 날씨 좋고 주택 및 물가가 싼 LA로 다시 이주했다.
특히 LA는 경제공황에도 재정적으로 여유가 큰 할리웃을 안고 있어 많은 음악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들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스튜디오의 지시를 따라야 했고 또 자기 음악에 대한 크레딧도 요구할 수 없는 노비와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쇤버그와 스트라빈스키와 바일 등도 영화음악을 시도했지만 모두 스튜디오와의 마찰로 포기했는데 나의 올타임 페이버릿 러브 송인 ‘세프템버 송’을 작곡한 바일은 할리웃을 ‘지옥’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영화음악을 몽키 비즈니스라고 부르면서도 ‘버나뎃의 노래’등 몇 곡을 작곡했으나 영화에 쓰지 못하고 후에 자신의 관현악곡으로 편곡해 사용했다.
그런 중에도 망명 음악가들이 할리웃 영화음악에 미친 영향과 성취는 지대한 것으로 그들은 이 음악을 하나의 장르로 성립시키면서 미국인들로 하여금 영화음악을 대중음악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들었다. 당시 영화음악인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은 ‘로빈 후드의 모험’의 음악을 작곡한 에리히 볼프강 콘골트였다.
LA로 이주한 많은 음악가들은 생활고에 시달렸다. 후에 USC 교수를 지낸 쇤버그도 한 때는 영화인들과 음악학도들의 개인교수를 하면서 끼니를 때웠다. 베를린의 유명한 카바레 작곡가였던 프리드리히 홀란더는 아내가 식품점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히고 나서야 멸시하던 싸구려 영화음악을 양산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정체성 문제였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에른스트 크레넥의 “난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말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음악가들 외에도 토마스 만과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및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망명 작가들도 LA의 같은 처지의 음악가들과 교분을 맺으면서 살았지만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귀국했다. 반면 스트라빈스키 등 많은 음악가들은 제2의 고향에 남았는데 이는 음악은 범세계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발견한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1938년 독일인 오페라 지휘자 후고 슈트렐리처가 LACC의 교수시절 세트 없이 피아노 2대가 오케스트라를 대신해 반주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케루비노 역을 한국인이 노래했다는 사실이다. 누구일까 궁금하다.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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