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딘의 유작으로 텍사스가 무대인 ‘자이언트’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록 허드슨이 아내 리즈 테일러와 멕시칸 며느리(그의 남편 역은 최근 작고한 데니스 하퍼)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길가의 식당에 들른다.
식당의 덩지가 큰 쿡은 허드슨이 백인이어서 마지못해 며느리에게도 서브를 하는데 이 때 식당에 멕시칸 노부부가 들어온다. 쿡이 이들에게 나가라고 소리치자 허드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쿡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서브하라고 요구하면서 두 거구의 남자 간에 격투가 벌어진다.
좁은 식당이 난장판이 되고 허드슨이 쿡의 일격에 식당 내 주크박스에 나가떨어지면서 노래가 나온다. 이 노래가 미치 밀러 합창단이 부르는 ‘텍사스의 황색 장미’로 쿡과 허드슨의 주먹다짐을 신나게 반주하는데 싸움은 허드슨의 녹다운으로 끝난다. 내가 밀러 합창단의 빅히트곡인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중학생 때 본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밀러 합창단의 음악과 노래가 사용된 또 다른 영화로는 ‘콰이강의 다리’와 ‘사상 최대의 작전’이 있다. ‘콰이강의 다리’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영국군 포로들이 행진할 때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나오는 ‘커널 보기 마취’는 우리가 학생때 운동장에서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갈때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면서 학생들이 마치 영국군 포로들처럼 그 박자에 발을 맞춰 행진하던 곡이기도 하다.
또 ‘사상 최대의 작전‘의 마지막 크레딧 장면에 나오는 합창도 밀러 합창단이 부르는 것인데 이 노래는 영화에서 미군 졸병으로 단역을 맡은 인기 팝가수 폴 앵카가 작곡한 것이다.
‘미치 밀러 앤 더 갱’이라는 이름의 자신의 남성 합창단으로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치 밀러<사진>가 지난달 31일 99세로 사망했다. 나는 밀러의 음악을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영화와 음악감상실에서 들으며 성장했는데 그의 히트곡들인 ‘사이드 바이 사이드’와 ‘유아 마이 선샤인’ 및 ‘바이 더 라이트 오브 실버리 문’ 등은 당시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었다.
밀러는 원래 클래시컬 오보 연주자로 히치콕의 영화음악을 여러 편 작곡한 버나드 허만이 지휘자로 있던 CBS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다가 팝으로 전향했다. 염소수염에 동화 속 아저씨처럼 생긴 밀러는 2차 대전 후 미국인들의 대중음악에 대한 취향을 글렌 밀러, 아티 쇼 및 베니 굿맨 등 빅밴드의 스윙뮤직에서 팝으로 전향시킨 장본인이다.
밀러를 팝의 우상으로 만들어준 것은 TV 프로 ‘싱 얼롱 위드 미치’ 때문이다. 물론 그는 이 전에도 히트곡을 냈지만 1960년대 초 NBC-TV를 통해 방영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이 프로가 국내는 물론이요 해외에서도 방영되면서 밀러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합창단이 옛 히트송과 신유행가를 부르면 가사가 TV 화면에 나와 시청자들이 함께 노래하는 프로로 요즘 유행하는 가라오케의 원조인 셈이다.
밀러는 합창단 단장으로서 뿐 아니라 팝음반 제작자로서 수많은 유명 가수들을 배출하고 히트곡들을 생산했다. 특히 그가 1950~1960년대 초까지 일한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기라성 같은 가수들과 히트송들을 줄줄이 내놓았다.
그가 빅 히트곡들을 취입시킨 가수들로는 도리스 데이, 패티 페이지, 토니 베넷, 자니 마티스, 프랭키 레인, 빅 다몬, 조 스태포드, 제리 베일 및 로즈메리 클루니(조지 클루니의 고모) 등이 있다. 그가 컬럼비아에 입사한지 3년 만에 내놓은 히트곡은 클루니의 ‘컴 온-어 마이 하우스’ 등 무려 51곡에 이른다.
클래시컬과 재즈와 팝을 사랑한 밀러는 그러나 록은 ‘음악적 문맹’이라며 싫어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취입을 거절했다고 한다. 밀러는 또 녹음기술에서도 혁신적인 방법을 도입한 사람이었다. ‘O.K.목장의 결투’ 등 웨스턴의 주제가를 많이 부른 프랭키 레인의 히트곡 ‘뮬 트레인’의 말발굽 소리와 채찍소리, 패티 페이지의 ‘하우 머치 댓 다기 인 더 윈도’의 개 짖는 소리 등이 그 예다.
페이지의 노래 중에는 자기가 자기 목소리에 이중으로 녹음한 오버더빙 송이 여럿 있는데 이 기술도 밀러가 개발한 것이다. 그는 또 녹음할 때 스피커와 마이크를 욕실에 놓고 해 공명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리기도 했다.
일에 있어선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밀러는 인본주의자였다. 후에 배우로도 활약한 흑인 여가수 레즐리 유감스는 밀러가 발굴해 ‘싱 얼롱 위드 미치’에 고정 출연했는데 방송사와 스폰서로부터 유감스를 해고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밀러는 생의 후반기에는 연 평균 80회 미국과 유럽의 교향악단을 객원지휘하며 음악활동을 계속해 왔다. 2000년에 그래미 생애 업적상을 받았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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