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마일.
밤새워 달린다면 내일 오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씨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차를 바라보았다.
색이 바래고 또 바래어 이제는 딱히 초록색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러나 한 낮에 바라보면 빛바랜 빛 속에 아슴푸레 남아있는 초록색 밴이 파킹랏 나무 밑 그늘 속에서 한 마리의 늙은 버펄로처럼 서 있었다.
허씨는 몸속 깊숙이 연기를 빨아 당겼다가 천천히 내 뿜었다. 입속을 빠져나온 담배연기는 방금 육신과 분리된 정령같이 스르르 제 몸을 풀어 헤치며 서서히 차가운 밤기운과 하나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도심지를 벗어나 15번 프리웨이와 70번 프리웨이를 타고 달리다보면 저만치 빈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차들이 있다. 달리고 싶어도 이제는 달릴 수 없는 차들이 80마일 90마일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며 덩그렇게 서 있다. 그런 차들 속에서 초록색 밴과 똑같은 밴을 보았다. L.A.로 돌아오는 삼일 전 이었다. 허씨는 프리웨이 옆으로 차를 세우고 10여 미터를 걸어와 그 차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나와 선지 며 칠 안 되는 것이 분명했다. 흰색 밴이었는데 창마다 유리만 없을 뿐이지 겉은 말짱해 보였다. 차바퀴도 그렇고 내려가서 시동만 걸면 그대로 부릉부릉 거리며 프리웨이위로 올라설 것만 같았다.
초록색 밴보다 더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허씨는 프리웨이 옆에 서 있는 초록 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흰색 밴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낡아도 길 위를 달릴 때 차는 차가 되는 것이다. 길을 내려 서있는 차는 이미 차가 아니었다. 허씨는 초록 밴 앞으로 다가가 차를 쓰다듬었다. 제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들 보다 더 깊게 갈라진 금들이 무수히 들여다보였다.
잘 달릴게다. 암, 잘 달리고말고.
차안에 하나 가득 실려 있는 보따리들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본 뒤에 허씨는 담뱃불을 끄고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시원스럽게도 단 한 번에 시동이 걸렸다. 기어를 풀고 천천히 핸들을 돌리면서 허씨는 이번 장사가 아주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씨는 아파트 이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아내는 먼 옛날 낡은 벽감속의 조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씨는 그것이 싫었다. 장거리 야행을 나설 때마다 아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것 보다는 차라리 들어가 있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그가 떠나는 날, 집에 있을 때면 아내는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그를 지켜보았다.
창가에 정면으로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아내의 얼굴은 늘 창백하고 부석부석해 보였다. 그 모습이 무겁게 마음에 와 내리고 또 아침 일찍 일을 나가야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장거리 야행이 부담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허씨는 일부러 언제나 출발시간보다 훨씬 일찍 길을 나서곤 했으나 오늘은 도착지에서 걸려온 부탁 전화를 받고 다른 물건들을 사러 다운타운을 다녀오는 바람에 출발시간이 예정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었다. 허씨는 아내에게 잘 다녀 오리다하는 뜻의 손짓 보다는 어서 들어가 쉬라는 손짓을 하면서 천천히 파킹랏을 빠져나왔다. 허씨는 동네를 벗어나 큰 길로 들어서기 직전 길을 따라 일렬로 서 있는 관상수들 사이로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아내는 아직도 창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따라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는지, 91E 프리웨이를 타면서부터 하늘을 덮고 있는 검은 구름 위로 한참동안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의 얼굴은 구름들 사이에서 어느 때는 뚜렷하게 어느 때는 흐리게 혹은 가뭇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으나 어느 것이나 창백하고 부석한, 툭- 건드리기만 하면 그대로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정말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툭-하고 창가에 떨어졌다. 허씨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전에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차창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소낙비였다. 허씨는 와이퍼를 작동시키면서 차의 속도를 조금 줄였다. 허씨는 이 소나기가 지금 창가에 서서 흘리고 있는 아내의 눈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주루룩-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닌, 그대로 폭포처럼 쏟아내는 한 생의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N로 프리웨이를 바꿔 타면서 허씨는 시계를 보았다. 9시. 혼자서 장거리 밤 프리웨이를 달리다보면 처음에는 낡은 초록색 밴을 생각하면서 규정 속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운전을하게된다. 그러나 한참 달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속력을 내어 달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 시간당 70마일로만 달린다고 해도 내일 정오쯤에는 무난히 덴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빅토빌과 바스토우를 지나고 한 시간을 더 달리자 차량이 드문드문 해지기 시작했다. 과속으로 질주하는 차량 몇 대가 그를 추월하더니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20피트 콘테이너 차 한 대가 줄기차게 그의 뒤를 따르더니 안쪽 레인으로 들어서서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허씨가 속력을 줄이자 그 차는 무서운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초록 밴이 흔들거렸다. 허씨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의 균형을 잡았다. 큰 차의 빨간 불빛이 자꾸만 멀어지더니 급기야는 어둠속으로 묻혀 보이지 않았다. 큰 차가 사라지자 앞 뒤 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깜깜한 천공이 낮게 내려와 길을 에워 싸버린 것 같았다. 허씨는 70마일을 유지하면서 차를 몰았다. 길 위를 비추는 헤드라이트의 불빛 밖은 온통 칠 흙보다 더 어두웠으므로 가시거리는 매우 짧았다.
한참동안 차 앞을 비추는 불빛만을 따라 운전을 하다보면 굴속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생각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옆 차창을 바라보면 어둠속에서 흔들리는 어두운 관목들이 보였고 저만치 서있는 산들의 실루엣이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으로 바람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멀리 맞은 편 길 위로 반짝 불빛이 보이더니 그 뒤를 이어 연달아 불빛이 나타났다. 대여섯 대의 차량이 일렬횡대로 거의 같은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만 한 거리에서 보면 한 마리의 기다란 야광 벌래가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차들이 가까이 질주해 왔다. 갑자기 선두를 달리는 차의 불빛이 허씨의 운전석 쪽 차창으로 화-악-하고 지나가고 곧 그 뒤를 이어 다른 불빛들이 순간적으로 번쩍 번쩍 반사되면서 사라졌다. 그러자 굴속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허씨가 밤 운전하면서 제일 부담 되고 긴장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굴속 현상이었다. 이 현상이 나타나기만 하면 허씨는 자신이 굴속에 갇힌 느낌이 들었고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이 굴속을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무서움을 잘 타는 겁 많은 어린아이였다. 집에서 동네를 걸어 나와 학교를 가려면 반드시 굴을 지나가야했다. 굴은 길었고 언제나 어둠침침했다. 중간쯤 들어서서 조금 휘어진 곳은 한낮에도 어둠이 짙게 내려 앉아 있어서 서너 명이 함께 걸어가도 섬뜩한 것이 무서웠다.
이따금 혼자 그 굴을 지나가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굴이 가까워지면서 자꾸 발걸음이 느려졌고 굴 앞에서 딱 발걸음이 멈춰졌다. 혼자서 굴을 들여다보는 것도 무서웠다. 굴 안에 가득 들어찬 어둠이 무서웠고 한 발 들여놓는 순간 퉁-하고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무서웠고 저 습기 찬 공기. 그리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깊은 어둠속 어디선가 뚝-뚝- 떨어지는 적막한 물방울 소리가 무서웠다. 그 굴속에 문둥이가 숨어 있다고 했다. 굴속 축축한 벽속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어린아이가 혼자 지나가면 슬그머니 손을 뻗어 아이를 벽속으로 끌어 들인다고 했다.
이따금 저 보다 더 큰 아이들과 함께 굴속을 지나갈 때면 그는 키가 제일 큰 아이 옆에 꼭 붙어 가거나 아이들 한 가운데에 끼어 갈려고 안달했다. 한 번은 굴속 중간쯤 어둠이 더 짙어지고 습기 찬 곳에 이르렀을 때 누군가가 갑자기 악- 소리를 지르며 그를 벽 쪽으로 떼밀고는 우루루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기겁을 하고 울면서 정신없이 큰 아이들을 뒤따라 달렸다. 그 뒤로 그는 큰 아이들과는 절대로 굴을 지나가지 않았다.
일 년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늦도록 학교에서 놀다가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굴 앞에서 사람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하루 햇살이 동그랗게 제 몸을 말며 굴 앞을 지나가는 시간, 혼자 굴을 지나가야만 했다.
그는 책가방을 단단히 둘러 맨 뒤에 심호흡을 하고는 굴속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쿵-쿵- 굴 안을 울렸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의 뒤를 쫓아오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 발소리가 무서워 더 달리기 시작했다. 굴속 모퉁이를 돌면서 저 멀리 밖이, 손바닥 보다 더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둥이의 뭉그러진 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것 같아 그는 악을 쓰며 달렸다. 굴 밖으로 튀어 나오면서 그는 땅위로 뒹굴었다. 숨이 턱 위까지 차올랐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땅위에 그대로 넘어진 채로 몸을 돌려 방금 그가 지나온 굴속을 바라보았다. 굴은 고요했다.
지금도 그랬다. 어쩌면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굴 보다 지금 프리웨이를 뒤덮고 있는 밤의 터널이 주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물론 허씨도 이런 현상은 이렇게 깜깜한 밤, 바로 앞에 비추이는 헤드라이트 불빛만 보며 운전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착시현상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 순간 한 순간 그 현상에 빠져드는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허씨는 밴 뒤로 차가 달려오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는 순간 자가용 한 대가 쏜살 같이 초록 밴 옆을 지나갔다. 앞차의 빨간 불빛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90마일 이상으로 달리는 것 같았다.
간간히 프리웨이 옆으로 불빛이 보였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외진 곳에서 혼자 살고 있을까? 밤길을 달리면서 산속의 혹은 끝없이 넓은 대 초원위의 한 점 불빛을 볼 때마다 허씨는 이런 곳에 혼자 외로이 뚝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식구들이 궁금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엔 세상을 등지고 혼자 뚝 떨어져 사는 사람들도 이렇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와 산다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인데. 처음부터 혼자 이곳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분명코 아닐 텐데, 세상을 살다 살다 여기까지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그 사연과 처지가 소설 열권으로 풀어내도 모자라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모든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이 취업일로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 하고 있을 때 그는 제대도 하기 전에 벌써 취직이 되어 있었다.
R.O.T.C.중위로 제대하기 반년을 남겨놓고 서울 출장 마지막 날에 그는 스승에게 인사라도 올릴 겸 학교를 들렀다. 교수님은 아직도 정정하게 학장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그를 보시더니 대끔 “자네, 잘 왔네. 원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교사 자리가 하나 났으니 당장 내려가 보게나. 인사는 나중에 하고 오늘 당장 내려가게.”
학장님은 등을 떼밀었고 그는 그 즉시 원주로 내려갔다.
학장님의 권유로 그는 교직을 잡고 있으면서 대학원엘 등록했다. 대학원 한 학기가 끝날 무렵 학장님이 그를 불렀다. 모 대기업에서 중견급 간부를 특수 채용하려고 하는데 의향이 어떠냐고 물었다. 대학원은 회사를 다니면서 다닐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장차 결혼 할 그녀와 상의했고 회사에 입사했다.
들어 간지 얼마 안 되어 과장이 되고 그는 해외 협력 문서 담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잘나가는 그를 부러워했다. 바로 위 상관은 모 일류대학 출신의 부장 대우였는데 같은 학교 출신의 부사장의 총애를 받고 있으면서도 아주 독특한 행동으로 임직원들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부장들끼리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면서 그를 부르면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나갈 것 같이 하다가는 갑자기 수화기를 들고는 다른 부장들이 다 기다리고 서 있는 바로 코앞에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전화를 해대는 거였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이 2년 되는 해에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해외 출장을 다녀와 곧바로 출장보고서를 올렸을 때 상관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루를 책상 속으로 밀어 넣었고 한 달 뒤에 그것을 꺼내 주면서 관리부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그가 회사일로 밖에 나갔다 돌아왔을 때 그의 책상 위에는 관리부장과 담당 이사. 상무. 전무. 그리고 부사장의 늑장보고 해명을 요구하는 글씨가 빨간 볼펜으로 출장보고서 겉표지에 커다랗게 휘갈겨 있었다.
상관은 그 즉시로 전출되었다. 전출되자마자 상관은 사표를 던졌고 그 회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타 회사로 자리로 옮겨버렸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고 뒤숭숭했다. 동료들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상관을 잘 만나야 된다는 말이 하급 직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떠돌았다. 그는 그 자리에 남았으나 인사고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매년 인사에서 제외되었고 급기야는 할 일도 하나 없는 한직으로 밀려나 버렸다. 상관의 실수. 그렇다. 상관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남보다 열배는 더 열심히 일했으나 회사의 시선은 차가웠다.
견디는 것도 한도가 있었다. 이 년 뒤에 그도 사표를 던졌다. 그 때부터 모든 것이 내리막길 이었다. 하는 것마다 잘 되는듯하면서도 모두 엎어지고 자빠졌다.
대학원을 계속 다녔어야 하는 건데. 허씨는 담배를 깊이 빨았다가 내뿜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의 길이 바뀔 수가 있는 것인지 정말 사람의 일이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차린 회사가 부도나고 망하고 하면서 쫓기듯 도망쳐온 미국. 미국에서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과 희망으로 온 이곳의 생활도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만만치는 않았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두 번째 회사가 넘어갔을 때 허씨는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고 심한 무기력증과 자포자기에 빠져 있었다. 앞뒤가 콱 막힌 굴속에 갇힌 것 같았다.
굴은 길었고 어두웠고 깊었다. 아무리 애써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벌써 미국에 온지 20년.
그 사이에 한 가족의 길이, 운명이. 한 가족 개개인의 길이, 운명이, 열두 번도 더 바뀌고 있었다.
20년이라.
허씨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지나온 세월이 정말 굴 속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기 싫은 굴속을 억지로 들어선 것은 아니지만 지나고 보니 어린 시절의 굴보다 더 어두운 굴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굴속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험준한 산길을 내려 한참을 달리자 갑자기 저 멀리 깜깜한 밤하늘의 한 모퉁이가 환해 보였다. 라스베가스였다. 게스가 한 눈금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한 번 쉬고 난 뒤에 계속 세 시간을 달려온 것이다. 허씨는 창문을 열었다. 갑자기 차가운 밤공기가 쉬이익 거리면서 차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허씨는 라스베가스의 초입에서 프리웨이를 내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차를 왼쪽으로 돌려 프리웨이 밑을 지나 주유소에다 차를 세웠다. 게스가 주입되는 동안 허씨는 마켓 안으로 들어가 소변을 보고 커피 한잔을 뽑아 들었다.
허씨는 커피를 마시면서 초록 밴을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숨도 안차고 잘 달려주는 밴이 기특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차 정비를 잘 해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벌써 삼십만 마일이 넘은 차였다. 새로 구입한 그 날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허씨와 함께 미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L.A. 근교만 다니던 것이 이제는 장이 서는 곳이면 어디든지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씨와 함께한 세월이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 밴을 바라보는 것은 곧 허씨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똑 같았다. 주유소 불빛 속에 서 있는 초록 밴은 떠나기 전보다 더 색이바래고 더 낡아보였다.
그래도 잘 달릴 것이다. 암. 잘 달리고말고. 걱정 되는 것은 로키산맥이었다. 그 산만 잘 넘어주면 돌아 올 때는 40번 프리웨이로 올 생각이었다.
주유소 건너편 카지노 쪽으로는 차들이 끊임없이 들어가고 나오고 있었다. 허씨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커다란 구름들이 느릿느릿 카지노 건물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라스베가스 시내 한 호텔에서 쏘아 올리는 광선이 그 구름들의 터진 사이를 뚫고 바벨탑보다도 더 높이 밤하늘 속으로 무한히 뻗히고 있었다. 허씨는 담배가 손끝까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그 광선과 카지노의 반라의 유혹적인 여인이 윙크하는 네온사인 판을 바라보다가 차에 올라탔다.
지금 싣고 가는 물건들은 모두 주말 장사에 필요한 것들 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내일 12시에는 덴버에 도착해야한다. 물건을 부탁한 사람들과 오로라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 그 곳에서 물건을 건네준 뒤에 함께 점심을 같이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못나오는 사람들 것은 다음 날 장터에서 건네주면 되었다.
그래야만이 허씨 자신도 여유를 갖고 장을 펼 수가 있었다. 혼자 멕시칸 모자를 팔고 있는 장씨의 목소리가 쟁쟁 울렸다.
“그러니까 내 물건은 꺼내기 좋게 제일 나중에 싣고 도착하면 바로 전화 줘요. 나도 나갈 거에요. 약주 한 잔 사드릴 테니까 드시고 올라가세요. 아셨죠. 꼭 전화 주세요.”
한번은 일요일 파장을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 마켓을 들러야 한다기에 허씨와 장씨 그리고 옷을 파는 이씨와 함께 장을 보고나와 중국집을 들렸었다. 배갈과 요리 하나를 시켜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장사 얘기로 시작해서 사는 얘기가 나왔을 때 장씨가 불쑥 말을 던졌다.
“덴버? 좋아서 온 거 아네요. 말로야 좋아서 왔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들 얼마나 되게요. 살다 살다 어쩔 수 없으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거지요. 흘러 들어와도 밑천이 쥐꼬리만 하니까 맨 날 노천에서 자리 펴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다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아참, 허씨는 아니지. 집이 L.A.에 있잖아요.”
조금 술이 알딸딸해져서 중국집을 나와 걸으며 허씨는 생각했다. 그래도 당신네들은 한 가족이 한 집에서 살고 있잖아. 흘러왔건 흘러갔건 그러면 된 거 아냐?”
허씨는 길이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길에서 자고 길에서 먹고 길에서 휴식을 취한 시간이 집에서 보낸 시간들 보다 백배는 더 길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살다 살다 어쩔 수 없이 어느 한 곳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만도 못한 삶이었고 산속의 외로운 불빛속의 사람들만도 못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그 생각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 해가 지나가고 또 한 해가 지나가면서 이렇게 사는 인생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허씨는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네바다를 벗어나 유타주로 들어서면 풍경이 변한다. 낮에 보면 사방이 온통 붉은 흙과 바위들이고 8000ft 고지대를 들어서도 한없이 평평한 초원을 달리는 것 같다. 콜로라도라는 주 명칭이 컬러 레드(Color Red)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허씨가 보기에는 유타주가 더 붉은색으로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예정 보다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런 속도로 달리면 내일 12시가 넘어서나 덴버에 도착할 것 같았다. 마주 오는 차들이 스쳐 지나가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차들이 허씨를 스쳐 지나갔다. 허씨는 조금씩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구름이 짙게 내려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옆 창을 바라보아도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앞에 가는 차가 한 대라도 있으면 좋을 듯싶었다. 정면 차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아도 정말 하늘인지 아니면 끝없이 긴 터널이지를 분갈 할 수가 없었다. 다시 굴속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내를 생각하면 허씨는 늘 눈물이 났다. 그가 대 기업을 사직하고 조그만 자기 회사를 차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내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숨을 쉬어 본적이 없었다. 늘 긴장의 연속이었고 불안의 연속이었다.
돈에 쫓기어 전전긍긍한 날이 수도 없이 많았고 사기를 당한 뒤 정신을 읽고 쓰러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올라탈 때 아내는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 뒤를 이어 미국 생활은 아내의 눈물로 날이 밝고 눈물로 날이 저물었다. 아내가 쏟아낸 눈물로도 태평양 하나는 더 생길 것 같았다.
두 번째 회사가 문을 닫았을 때 아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했다. 아내는 방구석에만 쪼그리고 있던 그를 일으켜 세우며 혼자 중얼 거리듯 말했다.
“크나 작으나 사람의 일은 하늘이 돕지 않으면 어쩔 수 없나 봐요. 가 보세요. 후배가 도와준다고 했어요. 해보아서 정 아니다 싶으면 그만 두세요. 나는 후배가게로 나가기로 했어요.”
그는 아내의 후배친구를 만났고 물건을 받아 장서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팔기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장시간 혼자 차속에 있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그를 아는 사람들을 떠나 낮선 곳 낮선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았다. 그가 밖으로 다니는 동안 집안일과 아이들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 되어 버렸다.
아내가 아픈 것 같았다. 자꾸만 얼굴이 부어올랐고 힘이 없어했다. 병원에 가라고 일러도 아내는 꿈쩍도 안했다. 자기의 아픈 것은 자신이 잘 안다면서 병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화를 내며 강제로 아내를 데리고 병원을 다녀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아내는 아무리 아파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 허씨는 아내가 예전의 여자에서 전혀 다른 여자로 바뀐 것이 눈물겨웠다. 허씨는 그런 모든 변화가 모두 그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한 처지를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뿐이 없었다.
결혼 하고 얼마 안 되어서, 지금은 누가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매일 변하는 여자”라는 수필을 읽고 나서 아내에게 한 말이 있었다..
“여자란 모름지기 매일 변해야 한데. 나는 이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해. 당신도 현재의 당신 모습에 만족하지 말고 매일 변하는 여자, 매일 매일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끌리는 아내가 되면 좋겠어.”
변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아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가 파라마운트에 있는 야외장터에서 몇 달 장사하고 난 뒤 아내에게 이것보다는 떠돌이 장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찬성도 반대도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장사를 마치고 아파트로 돌아 왔을 때 차고에 새 밴이 있는 것을 보았다. 초록색 밴이었다.
아내가 키를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 몰래 숨겨놓았던 돈으로 산거에요. 이 차로 장사를 다니세요. 우리 집 전 재산이니 잘 다루고 장사 잘 하세요. 헌 차는 팔아서 막내 학비로 보내겠어요.”
그는 키를 받아들며 아내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난생처음 아내의 등위로 눈물을 흘렸다.
허씨는 속력을 줄이면서 사인 판을 바라보았다. 40/50분 정도를 더 달리면 70번 프리웨이가 나올 것 같았다. 허씨는 프리웨이를 내려 주유소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았다. 10대 소녀 두 명과 일곱 여덟 살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스넥을 만지작거리다가 허씨가 들어서자 힐긋 바라보았다. 허씨가 “하이”하자 아이들이 손을 들어 보이고는 저회들끼리 툭툭 떠다밀면서 웃었다. 모두 명랑해 보였다. 허씨는 컵라면 하나와 칩을 집어 들고는 카운터 앞으로 다가갔다. 돈을 지불 한 뒤에 컵라면에다 뜨거운 물을 붓고는 잠시 기다렸다가 칩을 뜯어 넣었다. 그리고는 호주머니에 넣어 온 핫 소스를 뿌려 먹기 시작했다.
키가 큰 인디언이 다가오더니 컵라면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허씨가 알려주자 그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컵라면을 하나씩 집어오고 아빠는 두 개를 집어 카운터 앞에 놓았다. 사내 녀석이 달려가더니 스넥을 서너 봉지 안고와 함께 올려놓았다.
돈을 지불하고 더운 물을 부은 뒤에 모두들 허씨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허씨가 웃으며 핫 소스를 권하자 인디언 아빠가 고맙다고 하고는 아이들에게도 건네주었다. 아이들은 모두 신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인디언 아빠가 허씨에게 고향을 물었다. 한국이라고 대답해주자 인디언 아빠는 밖을 가리키면서 여기 유타가 자기 고향이라고 했다. 집은 아직도 한 시간 정도를 더 가야 한다고 했다. 갑자기 인디언 아빠가 자기는 붉은 흙에서 왔다고 했다. 이 아이들도 모두 붉은 흙에서 태여 나 자기한테 온 것이라고 했다. 허씨가 인디언 아빠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인디언 아빠는 얼굴도 붉고 드러난 팔뚝과 가슴이 온통 붉어 보였다. 아이들도 붉어 보였다. 허씨가 어떻게 흙에서 왔느냐고 묻자 그 아빠가 씨-익- 웃었다.
“사람만 붉은 흙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붉은 흙에서 온다. 모든 생명은 붉은 흙에서 태어나고 모든 생명은 죽어서 붉은 흙으로 돌아간다. 붉은 흙은 모든 생명 순환의 한 가운데 있고 따라서 인간도 그 생명 순환의 한 줄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다 동등하다. 버펄로 코요테는 우리 형제다. 새들은 우리 사촌이다. 진드기. 개미. 나비.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 꽃들도 모두 우리의 친척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이렇게 끝마친다. - 이 세상 모든 친척들을 위하여-. 우리들은 모두 붉은 흙에서 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 생명을 잘 안다.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허씨는 당황했다. 이런 질문을 받아 보기는 미국와서 난생 처음이었다. 허씨는 잠시 생각했다. 내가 어디서 왔느냐고? 그러고 보니 허씨는 이 나이가 되도록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씨가 대답이 없자 인디언 아빠가 허씨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허씨는 언젠가 산길에서 쉬면서 우연히 집어든 밴 안의 다 찢어진 무슨 책에서 읽은 것처럼 생각이드는 글 하나가 떠올랐다.
“나도 흙에서 왔다. 너처럼 그렇게 붉은 흙은 아니지만 황토 흙과 비와 바람이 한데 어우러져 태어났다.
흙과 비와 바람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죽으면 몸은 흙으로 다시 돌아가고 마음은 비가 내릴 때마다 비를 따라 흙속으로 스며들고 영혼은 바람을 따라 세상을 떠돈다. 떠돌다가 떠돌다가 인연이 닿아 내 몸과 내 마음이 다시 만나는 곳을 만나면 내가 아닌 나로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비와 바람과 흙에서 왔다.”
감동을 받은 인디언 아빠가 벌떡 일어서더니 앉아있는 허씨를 껴안았다.
“내 형제여.”
아이들이 서로 바라보며 낄낄 거렸다. 자기 아빠의 과장된 몸짓과 허씨가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허씨가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보니까 그들은 아직도 테이블에 앉아 컵라면을 즐기고 있었다. 허씨가 그들을 보며 “천천히 맛있게 들게나” 했더니 아이들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허씨는 주유소 마켓을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구름이 마구 흘러가고 있었다.
허씨는 차를 돌려 프리웨이로 들어섰다. 20피트 콘테이너 트럭이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차가 흔들 거렸다. 허씨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았다가 차가 제 속력을 내자 한 손으로 잡고 담배를 집어 들었다.
저 앞으로 15번과 70번이 갈라지는 곳이 보였다. 지금까지 8시간을 달려온 셈이었다.
허씨는 15번 프리웨이로 사라지는 차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오른쪽 레인으로 들어섰다. 들어섰다. 갑자기 가파른 산길이 나타나면서 오는 차도 없었고 가는 차도 없었다. 초록 밴 한 대 뿐이었다. 허씨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핸들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아직도 길은 멀었다. 70번을 들어 서고도 2시간 정도를 더 달려야 그랜정션이 나오고 거기서부터도 5시간정도를 더 달려야 덴버였다.
70번 프리웨이로 들어서면 지금까지 지나온 풍경과는 다른 풍경 하나가 갑자기 확- 펼쳐진다.
눈이다.
3월인데도 산봉우리마다 아직도 눈이 하얗게 덮여있고 프리웨이 쪽 산비탈에도 눈밭이 한없이 펼쳐져 있다. 작년 12월 중순부터 금년 1월까지 수 년 만에 처음으로 콜로라도와 록키산 일대에 내린 폭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산 정상의 눈은 한 여름 화씨100도 가까이 되는 고온에도 그대로 남아 멀리서 바라보면 꼭 흰 바위들처럼 보인다. 만일 날이 조금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한 여름 8월 혹은 9월의 어느 한 낮, 10,000피트 산 정상에 올라 맞은편 산에 남아있는 한 조각 눈을 보고 있노라면 그 눈과 하늘의 희뿌연 색이 일치되는 순간 눈은 사라지고 눈이 있던 그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 그 사이로 산 맞은편 하늘이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때로는 그 속으로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보인다.
밝음에 밝은 빛이 있듯이 어둠에도 어둔 빛이 있는 것일까. 그 어둔 빛이 눈에 닿으면 저런 차갑고 희푸른 빛을 내는가.
허씨는 어슴프레 환한 눈밭을 보며 천천히 엑셀을 밝았다.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특히 외아들 창호가 빗나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공부도 잘하고 영리한 아이었는데. 중학교 때 학생회장에도 출마한 아이었는데. 중학교 성적은 학교 전체에서 최 상위권에 들던 아이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잘 하기에 고등학교 가서도 잘 하리라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다.
아이가 일주일간이나 학교를 빠지고 여자아이를 만나고 있는 것을 몰랐다. 금발의 생쥐같이 생긴 백인 여자이이였다. 양쪽 집에서 모든 것을 알아버리자 둘이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붙어 다녔다. 점차로 그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여자 아이를 집으로 까지 데리고 들어와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둘이 꼭 달라 붙어있었다. 밤늦게 아내와 허씨가 집에 돌아와도 여자아이는 제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안하고 창호의 방에 박혀 있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창호는 단 한 번도 성적표를 보여주지 않았다. 자기 앞으로 오는 우편물을 엄마 아빠가 뜯기라도 하는 날이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졌다. 아들의 프라이버시. 딸의 프라이버시. 자식들 앞으로 오는 우편물을 뜯지 않고 그냥 건네주는 일에 익숙해지는데 무척 애를 먹었고 무척 많은 시간이 들었다. 특히 아내가 그랬다.
창호가 백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 아무데서나 껴안고 키스하고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내는 그 꼴 못 본다고 소리를 질렀다. 허씨가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는 창호 이야기를 하면서 화풀이를 남편에게 해댔다. “당신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매 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허씨는 가슴 속에서 욱-하는 불길이 솟았다가는 내려앉았다.
집에 오면 아이는 밖에 있었고 새벽이면 그가 집을 나섰기 때문에 창호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날따라 조금 일찍 집에 돌아온 그는 차고에 차를 넣고 이층으로 올라가 문 앞에 서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야릇한 신음 소리를 들었다. 순간 어쩔까 망설이다가 허씨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발가벗은 아들이 벌거벗은 백인 여자아이와 바로 문 앞쪽에서 서로 엉켜 뒹굴고 있었다. “옷을 입거라.”
허씨는 문을 닫고 그 앞에 서서 담배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었다. 둘이 거실 한 가운데 서있었다.
“나갈꺼냐?”
“네.”
창호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갔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뉴욕에 있다는 소리도 들리고 텍사스에 있다는 소리도 들리고 어느 때는 시에틀에 있다는 소리와 함께 시카코에 있다는 소리도 들렸다. 미 전국을 돌아다니는 모양 같았다.
서로의 소식이 끊어진 몇 년 어느 날 밤늦게 누가 문을 두드렸다. 그 여자아이였다. 창호와 백인아이를 닮은 어린사내아이가 옆에 서 있었다. 아내는 아이를 품었다 놓았다하면서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처음 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결혼식도 안올린 며느리는 아기와 함께 두 달을 머물다가 친정으로 갔다. 거기에서 며칠 더 있다가 캔사스로 간다고 했다. 창호가 그곳 어떤 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 뒤로 며느리는 몇 번 아이를 할머니 집에 맡기곤 했다. 아내가 일 때문에 도저히 돌볼 수 없다고 하면 며느리는 아이를 친정으로 데려갔다. 며느리와 아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수년전 겨울이었다. 혼자 찾아온 며느리는 무척 야위어 있었다. 식당에서 일한다고 했다. 커피를 들면서 며느리는 담담히 말했다. “헤어 졌어요.”
아내의 눈물은 모두 창호에 대한 눈물이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읽어버린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감으로 아내는 늘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남들은 모두 자식을 위해 미국으로 온다고 하는데 자신은 자식을 버리러 미국에 온 꼴이 되었다고 아내는 제 가슴을 쥐어박았다. 그럴 때마다 아내의 가슴속에는 대못이 하나 둘씩 박혔다.
구름이 낮게 내려오면서 처음보다 더 심한 착시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굴속이 더 깊고 더 어두워 보였다. 허씨는 이마의 진땀을 닦았다. 아까 먹은 컵라면이 안 좋은 것 같았다. 길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었다. 오른쪽 옆은 깊은 골짜기 같았다. 속력이 떨어지자 허씨는 다시 4D로 기아변속을 했다. 차가 다시 힘들게 그릉 그릉 거리며 오르기 시작했다. 꼭대기로 거의 다 올라섰을 때 허씨는 저 멀리 뒤 따라오는 불빛을 보았다.
올라온 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가파르게 보였다. 허씨는 조금 속력을 낮추고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뒤따라오는 불빛이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시멘트 믹서가 뒤에 연결되어 있는 큰 트럭이었다. 허씨가 속력을 낮추면서 낭떠러지 쪽 바깥 차선으로 빠지면서 길을 내 주었다. 먼저 보내기 위해서였다. 트럭이 안쪽 레인으로 들어서고 둘이 나란히 달리면서 허씨는 더 속력을 줄였다. 그와 동시에 큰 트럭이 갑자기 속력을 내었고 순간 허씨는 트럭 뒤에 달린 시멘트 믹서가 밴 쪽으로 달려든다고 생각했다. 허씨는 엉겹결에 핸들을 바깥쪽으로 돌렸다. 밴 오른쪽 앞부분이 낭떠러지를 따라 쳐있는 난간과 마찰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순간 허씨는 다시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차가 한 바퀴를 돌면서 안쪽 차선을 가로 질러가서는 프리웨이를 벗어나 움푹 페인 고랑을 걸치고 섰다. 절벽 바로 앞이었다.
허씨는 잠시 그대로 앉아있었다. 차창을 통해 눈 바로 앞에 보이는 거칠게 깎인 바위들이 헤드라이트 불빛과 주위의 어둠속에서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괴물같이 보였다. 차에서 내린 허씨는 차를 살폈다. 오른쪽 앞부분이 조금 칠이 벗겨지고 찌그러졌을 뿐 별 이상은 없는 듯 했다. 속력을 줄인 것이 목숨을 구한 것 같았다. 우선 차를 돌려야 했다. 그냥 후진을 하면 차의 앞바퀴가 고랑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차바퀴 밑에 깔 것을 찾고 있는데 멀리서 불빛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허씨는 큰 일 났다 싶어 차 안에서 흰 티 셔쓰 한 장을 꺼내 들고는 길 위에 서서 흔들었다. 차가 속력을 줄이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멈춰 섰다.
인디언 아빠와 아이들이 모두 뛰어 내렸다.
길을 다 내려가 조금만 더 가면 자기 집이라고 하면서 쉬었다가 날이 밝으면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인디언 아빠가 권했다. 허씨도 그러고 싶었다. 인디언 아빠 집이건 어디서건 그냥 드러눕고 싶었다. 누어서 잠시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고 있었다.
“고맙지만 가야합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너희들도 정말 고맙다.”
“그러면 조심해 가십시요.”
인디언 아빠가 셀폰 전화를 적어 주었다.
“만일 가다가 힘이 들면 전화 하세요. 여기서부터 내리는 데까지 내가 앞서 갈 테니 따라 오십시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데 사내아이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손을 흔들었다.
차창을 열자 아이가 손을 뻗혀서 무엇인가를 주려고 했다.
“뮈니?”
“부적 이예요. 이거 갖고 있으면 나쁜 일이 안 생긴데요. 받으세요.”
“고맙구나.”
허씨는 인디언 아빠와 아이들에게 고맙다고 손을 흔들었다. 허씨는 그들의 차가 프리웨이를내려 설 때까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인디언 아빠를 따라갔다. 프리웨이를 내리기 전에 인디언 아빠가 셀폰을 걸었다.
“우리는 내립니다. 이곳이 우리 집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은 어두워서 안 보이지만 낮에 보면 집 몇 채가 보일 겁니다. 그중의 하나가 우리 집입니다. 기회가 되면 아무 때라도 놀러 오십시오. 조심해 가십시오.“
허씨가 앞으로 나서서 그들과 나란히 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인디언 아빠와 아이들이 차창을 내리고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내리는 곳으로 눈길을 돌려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허허 벌판과 그 위에 드문드문 서있는 검은 산들 뿐이었다.
허씨는 인디언 가족이 고마웠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드라면 지금까지도 그는 그 사고 장소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허씨는 인디언 꼬마가 준 부적을 만지작거리며 이 부적의 힘으로 앞으로의 이번 여행은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죽을 번한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그를 도와주었다.
한 번은 와이오밍을 갈 때였다. 그 날은 밤 10열시도 안된 초저녁이었는데도 그렇게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면서 다음번에는 꼭 프리웨이를 내려 자고 가야지 생각을 하는 순간 허씨는 깜빡 졸았고 자신도 모르게 맞은편 차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맞은편 차선으로는 20피트 컨테이너차가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밤 프리웨이를 질주해 오고 있었다. 허씨가 차선을 이탈하는 순간 뒤따르던 차가 크고 빠르게 경적을 눌러댔다. 허씨가 깜짝놀라 눈을 뜨며 핸들을 돌리자 초록색 밴이 흔들리면서 맞은편 프리웨이에서 내려섰고 그와 동시에 컨테이너차가 지나갔다. 허씨는 양 차선 한 가운데 차를 세웠다. 뒤따르던 차가 다시 한 번 빵- 경적을 울리고는 지나갔다.
나이가 들수록 밤 운전이 힘들어 지고 있었다. 특히 빙판이 깔린 록키산맥을 넘을 때면 점점 더 힘이 들고 긴장되었다. 허씨가 이 일을 천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일을 떠날 수가 없었다.
아내가 이제는 그만두고 조그만 가게라도 하나 구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을 때 그도 그럴까하는 생각을 가져보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우선 마음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몸도 그것을 거부했다. 이것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베이커스 필드에서 돌아오면서 허씨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일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혼자 길 위에 서는 것에 익숙해진 자는 다시는 먼저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인디언 가족과 헤어지고 한참을 달려오면서 허씨는 차에서 오는 느낌이 전과 다른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무엇에 이상이 생겼는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차가 주는 느낌이 전과 다른 것만은 확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초록 밴은 허씨 몸의 한 부분이나 다름없었다.
새끼발가락 끝에 작은 가시가 박혀도 그 이상을 느낄 수 있듯이 차의 사소한 어느 한 부 분에 이상이 생겨도 허씨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고 알아낼 수 있었다. 허씨는 2차선의 바깥차선을 따라 규정 속도로 운전을 하면서 계속 차에서 오는 느낌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려고 신경을 손과 발로 모았다. 가파른 고개를 오를 때면 속력이 더 떨어지면서 전 보다 더 가릉가릉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허씨는 속력을 줄이면서 차도 옆 조금 넓은 공간에다 차를 세웠다.
산 속의 차가운 밤공기가 온 몸을 휘감았다.
허씨는 자켓을 꺼내 걸치고는 플레쉬를 비치며 차 밑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조금씩 기름과 물이 새고 있는 것
이윤홍
“내가 보은하는 길은 글쓰는 일뿐”
입상소감
아주 오랜 옛날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한 때가 있었다. 시인은 꿈도 꾸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밥 한 그릇에 목을 매고 되고 싶었던 한 때도 접고 꿈도 꾸지 않았던 꿈도 접었다.
차돌바위보다 더 굳어진 그 세월에 정을 댄 이는 누구였을까.
깊이 감사해야할 인연이 있다. 레지나와 문인귀 시인이다. 사랑하는 아내 레지나는 나를 다시 글로 이끌었고 문인귀 시인은 나를 잡아 글마당으로 내동댕이쳤다. 아직도 허리가 얼얼하지만 그 맛이 곧 큰 스승이시다.
참으로 미주한국일보와는 인연이 깊다. 2002년엔 나를 시인으로 만들고, 2007년엔 나를 산문가로 만들더니, 2010년엔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다. 보은하는 일은 글 쓰는 일 뿐이다.
킁, 킁, 죽었던 기억들이 살아 숨 쉬며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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